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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의가 독이 될 때

by 공감디렉터J


누구에게나 첫 직장의 기억은 선명하다. 서툴고 부족했기에 더욱 간절했고, 그만큼 성장의 폭도 컸다.

내 첫 직장은 소규모 회사였다.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 대신 선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영화 속 천재들처럼 한 번 보고 완벽하게 따라 할 재능은 없었기에, 현장에서 재빨리 메모하고 퇴근 후에는 하루를 복기하며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갔다. 업무 순서, 담당자 이름, 주의사항까지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1년이 지나자 업무가 손에 익었고, 직장 생활이 제법 즐거워졌다.

그즈음 더 큰 회사로 이직할 기회가 찾아왔다.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며, 그동안 적어둔 노트를 정리해 상세한 매뉴얼을 만들어 건넸다. 업무프로세스, 업무별 특성, 주의사항, 위기상황에 필요한 비상연락망까지.

1년간의 시행착오가 고스란히 담긴 '생존 가이드'였다.

선배들은 감탄했고, 나는 뿌듯했다. 내 노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했다.


몇 달 후, 첫 직장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후임자가 퇴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엔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점점 지쳐 보이더라고. 나중엔 불만도 터뜨리고... 결국 관계가 틀어져서 그만뒀어."


후임자가 남긴 말이 뼈아팠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데, 계속 전임자와 비교당하는 게 힘들었어요. 주신 매뉴얼대로만 하라는 것도 답답했고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내가 선의로 만든 매뉴얼이 누군가에게는 족쇄가 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도움과 강요 사이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저서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에서 "너무 많은 선택지나 지침은 오히려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내가 만든 상세한 매뉴얼이 후임자에게는 창의성을 억압하는 '정답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Adam Grant)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에서 "도움을 줄 때는 상대방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움과 강요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도움은 부담이 되고, 때로는 모욕이 된다.


나의 약, 너의 독

"과거에 나도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성과를 만들어 냈잖아. 너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종종 자신의 성공 경험을 타인에게 투영한다. 하지만 『마인드셋(Mindset)』의 저자 캐럴 드웩(Carol Dweck)은 "각자의 성장 경로는 다르며, 획일적인 성공 공식은 없다"고 말한다.


나에게 효과적이었던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개인의 강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이 있는 것 아닐까.


진정한 배려의 자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진정한 멘토링은 정답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방식이었어. 어디까지나 참고만 하고, 실행은 네 방식대로 하면 돼."


좋은 의도도 때로는 독이 된다. 상대방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는 도움은 오히려 관계를 망친다.

내 선의가 누군가의 창의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경계해야 한다.

도움은 제안하되 강요하지 말 것. 이것이 첫 직장에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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