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택시: 정든 직장과의 작별

세번째 에피소드

by 공감디렉터J


자정이 넘은 광화문. 불 꺼진 빌딩 숲 사이로 한 사내가 비틀거렸다.

50대 중반의 박 부장. 그의 손에는 25년치 청춘의 증거인 낡은 서류 상자가 들려 있었다.

오늘, 그는 구조조정이라는 네 글자와 함께 정든 직장과 이별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이 있던 17층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저 창문 너머에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전시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때, 그의 등 뒤로 이별택시가 그림자처럼 멈춰 섰다.

박 부장은 택시를 탈 생각도 없었지만, 열린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마치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 쉬게’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숨과 함께 상자를 싣고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허... 허무하네.”


혼잣말처럼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점차 울분에 가까워졌다.

입사 동기들과의 추억, 밤샘 야근 끝에 마시던 믹스커피의 맛, 딸의 대학 등록금을 받았을 때의 안도감까지. 그의 이야기는 성공 신화가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버텨낸 한 가장의 역사였다.


“회사가 나고, 내가 회사라고 생각했지. 청춘을 다 바쳤는데... 돌아온 건 이 종이 상자 하나야. 이제 나는 ‘박 부장’이 아니라 그냥 박 씨가 된 거야. 내 이름이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책상과 명함이 곧 자기 자신이었던 남자의 공허한 독백이었다.


택시는 그의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언덕길 공원 앞에서 멈췄다.

집으로 바로 들어갈 용기가 없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미터기 화면에 어김없이 선택지가 떴다.


[ 치유 ] / [ 권고 ]


박 부장은 잠시 화면을 노려보다가, 무언가 해답이라도 얻고 싶다는 듯 [권고] 버튼을 힘주어 눌렀다.

김기사는 백미러로 그의 지친 눈을 마주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책상과 명함은 당신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일 뿐, 당신의 이름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박 부장은 그 말을 곱씹었다. ‘수식어’.

평생을 자신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그저 수식어였다는 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차에서 내린 그는 상자를 벤치에 내려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 중, 이름 없는 별은 없었다.

이별택시는 지친 가장의 어깨를 뒤로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평생을 바친 곳에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추억뿐이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퇴직금이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