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택시: 가스라이팅의 덫

네번째 에피소드

by 공감디렉터J


새벽 2시, 인적 끊긴 주택가 골목길.

낡은 가로등 불빛만이 위태롭게 깜빡이는 곳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20대 후반의 수진. 그녀는 얇은 카디건 차림으로 자신의 작은 여행 가방 손잡이를 하얗게 질릴 때까지 꽉 쥐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가 쫓아올 것처럼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는 그녀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켜지며 이별택시가 소리 없이 그녀 앞에 멈췄다.

문이 열렸지만, 수진은 망설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덫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을 재촉하는 사람도, 의심하는 눈초리도 없는 택시의 고요함에 이끌려, 그녀는 결국 차에 올랐다. 차 안은 안전한 동굴 같기도, 혹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 같기도 했다.


김기사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한참 동안 손톱만 물어뜯던 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망쳤어요... 그 사람한테서.”


그녀의 ‘그 사람’은 5년을 만난 연인이었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사랑은 집착이라는 이름의 덫이 되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사랑해주겠어?’,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다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매일같이 그런 말을 들었어요. 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정말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요.”


그는 수진의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냈고, 그녀의 자존감을 조각조각 부쉈다.

그녀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는 ‘지나친 예민함’으로 치부되었고, 그의 폭력적인 언행은 ‘깊은 사랑’으로 포장되었다. 수진은 서서히 자기 자신을 잃어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게 되었고, 그의 세계가 자신의 세상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별을 생각할 때마다 ‘나 같은 걸 누가 받아주겠어’라는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오늘도 그랬어요.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더니,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무릎을 꿇고 빌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 깨달았어요. 이건 사랑이 아니구나.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나는 정말 사라지겠구나.”


택시는 어느덧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역 대합실 앞에 멈춰 섰다.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수많은 시작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수진의 눈앞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 치유 ] / [ 권고 ]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충고나 조언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겼으니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망가진 내면을 다독여줄 위로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치유]를 향했다.

김기사는 룸미러로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상처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었을 뿐입니다.”


수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지난 5년간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

자신의 고통을 온전히 인정해 주는 그 한마디에, 그녀를 옭아매던 단단한 쇠사슬이 끊어지는 듯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더 이상 주위를 살피지 않았다. 여행 가방을 든 그녀의 발걸음은, 새벽의 첫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이별택시는 새로운 시작을 향해 떠나는 뒷모습을 뒤로한 채, 다시 도시의 새벽 속으로 사라졌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전부였던 당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당신의 진짜 세상을 만나는 첫걸음이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