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에피소드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밤 11시.
아파트 단지 놀이터 그네에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홀로 앉아 있었다.
유진. 그녀는 발끝으로 땅에 의미 없는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스마트폰은 꺼둔 지 오래였다.
세상의 전부였던 가장 친한 친구, 소희가 자신을 배신했다.
교환일기장에 몰래 적었던 짝사랑의 비밀과 가족에 대한 불만을 반 아이들 전체에게 퍼뜨려,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다.
유진은 소희가 자신의 세계 그 자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세계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카카오톡 단체방은 자신을 조롱하는 메시지로 가득 찼고, 복도를 지날 때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녀의 ‘이별’은 단순한 친구와의 절교가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던 세계 전체와의 작별이었다.
그때, 놀이터의 낡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이별택시가 멈춰 섰다.
낯선 차의 등장에 놀랄 법도 했지만, 유진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천천히 일어나 택시에 올랐다.
이 지옥 같은 동네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차 안의 깊은 정적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유진이 꾹꾹 눌러왔던 말들을 쏟아냈다.
“걔가 제 세상의 전부였어요. 그래서 모든 걸 말했는데... 걔는 어떻게 그걸... 걔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제 어떡해요? 내일 학교 갈 자신이 없어요. 그냥 다 사라지고 싶어요.”
어린 목소리에 담긴 절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김기사는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서울의 언덕길을 올랐다.
택시가 멈춘 곳은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산공원 성곽길이었다.
발아래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 속에 그녀가 다니는 학교도, 그녀를 괴롭게 하는 아이들이 사는 집도, 모두 작은 점처럼 보였다.
[ 치유 ] / [ 권고 ]
유진은 구체적인 복수 방법이나 해결책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산산조각 난 마음을 어떻게든 붙여보고 싶었다.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이 [치유]를 선택했다.
김기사는 도시의 야경을 등지고 앉은 어린 승객에게, 담담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라는 책은, 가장 좋아했던 페이지를 찢어내야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 말에 유진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소희는 분명 가장 좋아했던 페이지였다.
하지만 그 페이지에만 머물러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찢어내는 것은 아프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를 위한 과정이었다.
차에서 내린 유진은 한참 동안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불빛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빛나는 저 점들 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고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아프면서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별택시는 가장 혹독한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작은 등을 뒤로하고, 다시 도시의 불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세상 전부와도 같던 한 사람과의 이별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첫 수업이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