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에피소드
밤늦은 시간, 조명이 모두 꺼진 고등학교 운동장.
축구부 유니폼을 입은 소년, 진수가 절뚝이며 텅 빈 골대 앞에 서 있었다.
한 달 전, 경기 중 입은 무릎 부상으로 그는 의사에게서 재활해도 선수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최종 통보를 받았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였던 열여덟 소년에게 그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의 발밑에는 한때 분신과도 같았던 낡은 축구공이 놓여 있었다.
그는 공을 걷어찰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난 현장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운동장 스탠드 뒤편의 어둠 속에서 이별택시가 나타나 그의 앞에 멈췄다.
진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자신의 유일했던 무대였던 그라운드를 떠나 택시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만 노려보던 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분노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0년이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공 하나만 보고 달렸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게 끝났어요. 의사가 그러더군요. ‘이제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말은 쉽죠. 축구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뭘 어쩌라고...!”
그의 절규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데서 오는 깊은 절망감이었다.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만 살아 숨 쉴 수 있는 존재였다.
이제 그는 경기장 밖으로 내쫓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제 원래 꿈은 그냥 축구가 좋았던 거였어요. 박지성 선수처럼 뛰는 게 멋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골을 넣는 게 즐거웠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프로 선수’가 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렸어요. 즐거움은 사라지고, 꿈은 의무가 되어버렸죠.”
택시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앞에 멈췄다.
수많은 함성과 영광이 서려있는 대한민국 축구의 성지. 선수로서 저 잔디를 밟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였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꿈의 무덤 앞에서 그는 고개를 떨궜다.
[ 치유 ] / [ 권고 ]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당장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이 막막한 현실을 헤쳐나갈 ‘방법’이 필요했다. 진수는 망설임 없이 [권고]를 선택했다.
김기사는 거대한 경기장을 가리키며, 구체적인 다음 행동을 제안했다.
“선수의 길은 끝났을지 몰라도, 축구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라운드를 두 발로 뛰는 대신, 머리로 분석하고 가슴으로 전략을 짜는 길도 있습니다. 당장 내일, 도서관에 가서 축구 전술과 스포츠 의학에 관한 책을 한 권씩만 빌려보십시오. 당신의 ‘원래 꿈’은 ‘축구 선수’가 아니라, ‘축구’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진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선수만이 축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 분석관, 해설가, 에이전트...
그는 그동안 한 가지 길만 보고 달려왔다.
김기사의 권고는 닫힌 문 옆에 있던 수많은 다른 문들을 보게 해주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더 이상 경기장을 원망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저곳에 서게 될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듯했다.
이별택시는 꿈의 좌절 앞에서 새로운 꿈의 지도를 받은 소년을 뒤로하고 다시 출발했다.
하나의 문이 닫혔다는 절망은,
그 문이 유일한 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희망이 된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