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택시: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열번째 에피소드

by 공감디렉터J


해 질 녘, 고서점의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먼지 쌓인 책등을 비추고 있었다.

50대 후반의 저명한 소설가, 박 작가는 텅 빈 원고지 뭉치를 든 채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한때는 써내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지금 그는 10년째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시간은 30년 전, 첫사랑과 헤어진 그 순간에 멈춰 있었다.


그의 앞에 이별택시가 낡은 책갈피처럼 조용히 멈춰 섰다.

박 작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멈춰버린 이야기를 이 차가 다시 움직여줄 것이라 예감하며 올라탔다.


차 안에서 그는 자신의 창작과 사랑에 대한 오랜 고뇌를 토로했다.

그의 모든 글은 첫사랑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그녀의 눈빛, 목소리, 함께 걸었던 거리의 냄새가 그의 문장이 되고 소설이 되었다.

그녀는 그의 뮤즈이자 그의 세계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녀의 기억은 살아있는 영감이 아닌, 아름다운 화석이 되어버렸다.


“그녀와의 추억이라는 우물은... 이제 다 마른 것 같네요. 그 기억을 놓아주자니 내 글의 근간이 사라질 것 같고, 계속 붙들고 있자니 더는 아무것도 써지지 않습니다. 나는... 내 청춘의 가장 빛나는 순간과 이별하지 못한 대가로, 작가로서의 현재를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별은 한 사람과의 이별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장 빛났던 과거, 그리고 그 과거에 기생하여 연명해 온 자신의 작품 세계와의 결별이었다.

창작과 추억 사이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택시는 그의 고백을 들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수많은 이야기가 매일 밤 새롭게 태어나는 정동의 한 극장 앞에 멈췄다.


[ 치유 ] / [ 권고 ]


박 작가는 쓰는 ‘방법’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다시 쓸 수 있다는 ‘마음’을 되찾아야 했다.

그는 지친 손으로 [치유] 버튼을 눌렀다. 김기사는 극장의 환한 간판을 바라보며, 그의 문학 인생 전체를 꿰뚫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사랑은 글감 자체가 아니라, 작가님께서 글을 쓰도록 처음 불을 지펴준 성냥 한 개비였을 뿐입니다. 불은 이미 작가님의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 불로 무엇을 태울지는 작가님의 선택입니다.”


성냥 한 개비.

그 한마디가 박 작가의 뇌리를 쳤다.

그는 거대한 불의 존재를 잊은 채, 다 타버린 성냥개비만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작이었을 뿐, 그의 창작력 자체가 아니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극장 앞에 서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수십 년간 자신을 짓눌러온 기억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그의 손에 들린 원고지가 더 이상 백지가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별택시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예감을 뒤로하고, 다시 밤의 서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갔다.


추억이라는 잉크가 너무 가득하면,
현재라는 새하얀 종이 위에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된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