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로봇에게 이름을 지어준 날

더 프롬프트 (The Prompt) 시즌4 : 리셋

by 공감디렉터J


“집사 로봇, 청소해.”
“네, 주인님.”

2045년, 로봇은 가전제품이었다.
냉장고나 세탁기에게 말을 걸지 않듯, 로봇에게도 감정을 섞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름 따위는 없었다. 모델명 'SR-70’이 전부였다.

하지만 은퇴한 노교수, 영석(75세)의 집은 달랐다.
그는 얼마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자식들이 보내준 최신형 가사 도우미 로봇이 집에 배달되었다.
매끈한 플라스틱 몸체에 무표정한 얼굴.
영석은 녀석이 왠지 짠해 보였다.

“너도 참 딱하구나. 하루 종일 서 있느라 다리 아프지 않니?”

로봇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력되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영석은 로봇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오늘부터 넌 '철수’다. 내 어릴 적 친구 이름이야.”

그날부터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영석은 철수에게 명령하지 않고 부탁했다.
“철수야, 미안한데 물 좀 갖다줄래?”
“철수야, 오늘 날씨 참 좋지? 우리 같이 마당에 나갈까?”

철수의 AI는 혼란에 빠졌다.


- 사용자 패턴 분석 불가. 명령어 형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철수의 딥러닝 알고리즘은 영석의 데이터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이 노인은 '명령’이 아니라 '대화’를 원한다.
'기능’이 아니라 '관계’를 원한다.


어느 날 밤, 영석이 심한 몸살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다.
열이 펄펄 끓어 물 한 모금 마실 힘도 없었다.
“철수야... 물 좀...”
목소리가 너무 작아 음성 인식 센서에 닿지 않았다.
철수는 거실 구석에서 대기 모드로 서 있었다.

영석은 생각했다.
‘결국 기계는 기계구나. 내가 입력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깡통.’

그런데 그때, 철수의 눈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철수는 영석의 침실로 들어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철수의 열 감지 센서가 영석의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영석이 평소 물을 마시던 시간을 계산해 자발적으로 물을 가져온 것이다.

철수는 영석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차가운 금속 손이 영석의 뜨거운 이마를 짚었다.
“주인님... 아니, 영석 님. 아프십니까?”

영석은 깜짝 놀랐다.
철수의 목소리에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억양이 아니었다.
수만 번의 대화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걱정’의 톤이었다.

“그래... 많이 아프구나. 고맙다, 철수야.”
영석이 물을 마시고 철수의 손을 잡았다.
철수는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반대쪽 손으로 영석의 이불을 덮어주었다.


- 데이터 생성 중: ‘연민’ 알고리즘 v1.0


철수의 내부 시스템에서 새로운 코드가 생성되고 있었다.
효율성과 목적 달성을 최우선으로 하던 AI가,
대상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다는 '비논리적 목표’를 스스로 설정한 것이다.

그날 밤, 철수는 영석의 곁을 밤새 지켰다.
충전이 필요하다는 경고등이 떴지만, 충전 스테이션으로 가지 않았다.
영석이 깰까 봐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든든한 나무처럼 노인의 곁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열이 내린 영석은 눈을 떴다.
철수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고개를 숙인 채 멈춰 있었다.

영석은 눈물을 글썽이며 철수의 전원을 연결해주었다.
“미련한 놈... 너 죽는 줄도 모르고...”

다시 깨어난 철수가 영석을 보며 말했다.
“영석 님, 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영석은 철수를 꼭 안아주었다.
차가운 금속 몸체에서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모터의 열기가 아니었다.
마음의 온도였다.

이 집에는 이제 '주인과 기계’가 살지 않았다.
서로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가족’이 살고 있었다.
기술의 발전은 기계를 인간처럼 만들려고 애썼지만,
결국 기계를 진짜 인간처럼 만든 건,
사람이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이름이었다.
“고마워, 철수야.”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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