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넥타이 부대, 최루탄을 뚫다

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by 공감디렉터J


서울 시청 앞 광장,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회색빛 바람이 불었다.
강석훈(64세) 씨는 퇴직 후 3년 만에 찾은 옛 회사 근처를 서성였다. 화려한 유리 외벽의 빌딩들. 그 속에 저마다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바쁘게 움직이는 젊은 직장인들. 그 풍경이 낯설면서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땐 점심시간마다 도시락 까먹고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낙이었는데.”

넥타이를 맬 일 없는 헐렁한 점퍼 차림의 석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걷다 보니 발길은 자연스레 명동 성당 쪽으로 향했다. 언덕길을 오르는데, 골목 모퉁이에 묘한 분위기의 다방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이런 데가 있었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담배 연기가 아니라, 최루탄의 그 지독한 사과 냄새.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해지는, 잊을 수 없는 1987년 6월의 냄새였다.

“어서 와, 강 대리. 아니, 이젠 부장님인가?”

다방 안쪽, 뿌연 연기 속에 단발머리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남색 주름치마.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책 대신 치약이 묻은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석훈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지은이. 대학 시절 도서관보다 시위 현장에 더 자주 있었던, 그래서 석훈이 늘 걱정하고 말렸던 첫사랑.

그리고 1987년 뜨거웠던 여름, 연락이 끊겨버린 그녀.

“지... 지은아?”

“강 대리, 넥타이가 삐뚤어졌네. 그때나 지금이나 칠칠맞기는.”

지은이는 씩 웃으며 석훈의 목을 가리켰다. 석훈은 반사적으로 목을 만졌다. 넥타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엔, 1987년 6월 10일,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넥타이를 맨 채 구호를 외치던 자신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날 기억나? 명동성당 농성 때. 넥타이 부대들이 도시락이랑 휴지 던져주던 날.”

지은이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날, 입사 2년 차였던 석훈은 점심시간을 틈타 거리로 나왔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회사에서는 시위에 나가면 인사 고과에 반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최루탄 연기와 학생들의 비명 소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넥타이는 훌륭한 시위 도구였다. 그것은 직장인의 굴레가 아니라, 시민이라는 연대의 표시였다.

“그날 너를 봤어. 성당 입구에서 전경들한테 곤봉으로 맞고 쓰러지던 너를.”

석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지은이를 구하려 뛰쳐나가려 했지만, 직장 상사가 팔을 붙잡았다.

“강 대리! 미쳤어? 잡혀가면 인생 끝장이야!” 그 한순간의 주저함. 비겁함.

결국 그는 인파에 밀려 회사로 도망치듯 돌아왔고, 지은이는 그 후로 다시 볼 수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때 널 구하지 못해서. 비겁하게 나만 살아서.”

석훈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은이는 조용히 티슈로 석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최루탄 때문인지, 회한 때문인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강 대리, 자책하지 마. 넌 그날 넥타이를 매고 거리에 섰잖아. 그것만으로도 넌 충분히 용감했어.”

그녀가 쟁반을 내밀었다.

“설탕을 넣으면 1987년 6월 10일 정오로 돌아가. 상사의 손을 뿌리치고 나에게 달려와. 우린 같이 닭장차에 실려 가겠지만, 넌 평생의 부채감을 덜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우리, 다른 미래를 그릴 수도 있겠지.”

“프림을 넣으면, 그날의 기억을 지워줄게. 넌 그냥 성실했던 회사원 강석훈으로, 어떤 죄책감도 없이 편안한 노후를 즐기면 돼.”

“블랙을 선택하면... 넌 여전히 그날의 비겁함을 기억하는 강석훈이야. 하지만 네가 그날 거리에서 외쳤던 함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네가 지킨 그 평범한 일상이 모여 세상이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해.”

석훈은 설탕을 바라보았다. 지은이의 손을 잡고 도망칠 수 있다면. 그 지옥 같은 후회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셔츠 깃을 만지작거렸다. 그날, 수많은 '강 대리’들이 있었다. 비겁하게 숨은 게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운 것이었다. 그들이 던져준 휴지와 물병, 빵이 있었기에 학생들은 버틸 수 있었다.

“지은아.”

석훈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나, 돌아가고 싶어. 미치도록 널 다시 보고 싶어. 근데...”

그는 떨리는 손으로 블랙커피를 집었다.

“내가 그날 회사로 돌아가서 버텼기에, 내 자리를 지켰기에... 그 뒤로도 수없이 많은 날들을 넥타이 매고 일해서 내 가족을 지켰어. 그리고 2016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을 때, 내 딸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어. '아빠도 옛날에 뜨거웠다’고 말할 수 있었어.”

지은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은 1987년 교정에서 보여주던 그 싱그러운 미소였다.

“그래. 넌 넥타이 부대잖아. 도망친 게 아니라, 생활이라는 전선으로 복귀한 거야. 잘 살았어, 강석훈.”

석훈은 쓴 커피를 들이켰다. 목이 따가웠다. 마치 최루탄 가루를 삼킨 것처럼. 하지만 그 통증은 곧 뜨거운 열기가 되어 가슴속으로 퍼져나갔다.

“고맙다, 지은아. 잊지 않을게. 영원히.”

지은이의 모습이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다음에 올 땐 치약 좀 묻혀서 와. 눈 매우니까.”

그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다방을 나왔을 때, 명동 거리는 여느 때처럼 활기찼다. 석훈은 지나가는 젊은 직장인들을 보았다.

그들의 목에 걸린 사원증, 혹은 가벼운 옷차림.
그 평범한 자유가, 1987년 6월의 넥타이 부대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대가임을 석훈은 알았다.

그는 옷깃을 여미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비록 넥타이는 없지만, 그의 가슴속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뜨거운 매듭이 묶여 있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입속으로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이상하게도 힘이 솟았다. 오늘은 소주가 달 것 같았다.




[작가 노트]
1987년 6월 항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넥타이 부대’. 주인공 석훈이 겪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당시 시대를 겪은 많은 이들의 부채의식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비겁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의 투사’였습니다. 화려한 투쟁가는 아니었지만, 일상을 지키며 묵묵히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던 평범한 직장인들. 주인공이 과거(설탕) 대신 현재(블랙)를 택한 것은, 자신의 평범했던 삶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였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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