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OB 베어스와 나의 첫 번째 글러브

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by 공감디렉터J


“할아버지, 이거 봐! 이번에 류현진이 던진 공, 회전이 장난 아니지?”

열 살짜리 손자가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 영상 속에서 공은 뱀처럼 휘어 포수 미트에 꽂혔다.
이정훈(63세) 씨는 빙긋 웃으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대단하네. 근데 말이다, 할아버지는 박철순이 더 멋있었어.”
“박철순? 그게 누구야? 류현진보다 잘해?”
손자는 금세 흥미를 잃고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훈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1982년. 대한민국에 프로야구가 처음 생기던 그해.
잠실야구장의 함성, 특유의 남색 유니폼의 OB 베어스, 그리고 '불사조’라 불리던 투수 박철순.
정훈의 가슴속엔 아직도 그해 가을의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은퇴 후 찾아온 무기력함은 9회 말 투아웃 만루의 위기처럼 그를 조여오고 있었다.

산책이나 할 겸 나선 공원 길, 유독 오래된 가로등 아래 낯선 불빛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다방 문을 열자 훅, 하고 익숙한 가죽 냄새가 났다. 길들여지지 않은 뻣뻣한 소가죽 냄새. 그리고 나무 배트가 서로 부딪히는 딱, 딱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어서 와, 4번 타자.”

카운터가 아닌, 다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국민학교 책상. 그곳에 까까머리에 콧물을 훌쩍이는 소년이 앉아 있었다. 꼬질꼬질한 런닝셔츠에 헐렁한 반바지, 그리고 손에는 다 낡아빠진, 테이프로 칭칭 감은 야구 글러브가 들려 있었다.

정훈은 숨을 들이켰다. 잊을 수 없는 얼굴. 열두 살의 나, 정훈이었다.

“너... 그 글러브.”
“아빠가 사준 거잖아. 돼지 저금통 털어서.”

소년 정훈이 씩 웃었다. 앞니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랬다.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가 사주신 싸구려 비닐 글러브.

하지만 정훈에겐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 1호였다.

매일 밤 머리맡에 두고, 가죽 냄새를 맡으며 메이저리거가 되는 꿈을 꾸었더랬다.

“근데 왜 야구 관뒀어? 우리 진짜 잘했잖아. 동네 야구 짱 먹었잖아.”

소년이 원망 섞인 눈으로 물었다. 정훈은 고개를 떨궜다.


중학교 야구부 입단 테스트 날. 하필이면 그날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다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테스트는 포기했고, 야구 대신 신문 배달과 구두닦이 통을 들어야 했다. 꿈은 사치였다.

“미안하다. 사는 게... 사는 게 너무 바빴어. 공 던지는 것보다 밥벌이하는 게 더 무겁더라.”

정훈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소년은 책상 서랍에서 낡은 야구공 하나를 꺼내 정훈에게 던졌다. 툭. 정훈은 반사적으로 공을 받아냈다.

손바닥에 닿는 묵직한 감각. 실밥 하나하나가 손끝에 느껴졌다.

“아직 안 죽었네, 이정훈.”

소년이 킬킬거렸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커피 쟁반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자, 4번 타자의 선택이야.”

“설탕을 넣으면, 1982년 그날로 돌아가. 아버지 사고 소식은 모른 척하고 테스트 받으러 가. 넌 재능 있었으니까, 분명 프로 선수가 됐을 거야. 박철순이랑 같이 마운드에 섰을지도 모르지.”

“프림을 넣으면, 그냥 편한 관중석으로 보내줄게. 야구 따위 몰랐던 사람처럼,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팝콘이나 먹으면서 구경하는 인생.”

“아무것도 안 넣으면? 넌 여전히 야구를 포기한, 배 나온 은퇴자 이정훈이야. 하지만...”

소년은 말을 아꼈다.
정훈은 설탕을 집었다. 야구. 내 평생의 한(恨). 다시 그 마운드에 설 수만 있다면.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문득, 손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나랑 캐치볼 하자!”
야구를 못 하게 된 대신, 정훈은 야구광이 되었다. 아들을 데리고, 또 손자를 데리고 야구장을 찾았다.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고, 치킨을 나눠 먹으며 울고 웃었다.
내가 선수가 되지 못했기에, 나는 최고의 팬이 될 수 있었다. 내 아들과 손자에게 야구의 즐거움을, 패배해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야, 꼬마야.”

정훈은 설탕을 내려놓았다.

“나 야구 안 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야.”

“뭐? 후회 안 해?”

“후회? 했지. 밥 먹듯이 했지. 근데 말이야, 내가 마운드에 서지 못해서 관중석에서 내 가족들이랑 파도타기 응원하는 재미를 알았잖아. 9회 말 투아웃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끈기를 배웠잖아.”

정훈은 블랙커피를 집어 들었다.

“내 인생은 홈런은 아니었어도, 끈질기게 버텨서 출루한 ‘볼넷’ 정도는 된다. 그거면 충분해.”

그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쌉싸름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마치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킨 것처럼 가슴이 뻥 뚫렸다.

“멋지다, 우리 4번 타자.”

소년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글러브를 낀 손을 내밀었다.
정훈은 그 작은 손바닥에 야구공을 꾹 쥐어주었다.

“잘 간직해라. 그게 내 꿈의 시작이었으니까.”

소년이 환하게 웃으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뜨자, 다시 공원 가로등 밑이었다.
정훈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묵직한 게 잡혔다. 야구공이었다. 40년 전 잃어버렸던 그 낡은 사인볼.

“할아버지!”

저 멀리서 손자가 글러브 두 개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심심해. 캐치볼 하자니까!”

정훈은 빙그레 웃으며 손자에게 다가갔다.
“그래, 한판 붙자. 할아버지가 왕년에 말이야...”

밤공기를 가르는 공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1982년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2025년의 어느 공원에서, 또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었다.




[작가 노트]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유년기를 보낸 '야구 키즈’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꿈을 이루지 못한 회한은 5060 세대의 공통된 정서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정훈은 '설탕(과거의 영광)'을 거부하고, 비록 선수는 아니었지만 '최고의 관중’으로서 삶을 즐겨온 현재(블랙)를 긍정합니다. "내 인생은 볼넷 정도는 된다"는 대사는, 화려한 성공은 아니더라도 끈기 있게 삶을 살아낸 평범한 가장들의 자존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