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모래바람 속에 묻어둔 달러

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by 공감디렉터J


후끈한 열기. 분명 에어컨이 돌아가는 거실인데도 박철호(67세) 씨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TV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 건설 수주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첨단 빌딩 조감도가 화면을 채웠지만, 철호의 눈에는 그 화려함 뒤에 숨은 누런 모래바람만이 보였다.

“아빠, 저 이번 휴가 때 베트남 다낭 가요. 용돈 좀...”
서른 넘은 딸아이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철호는 말없이 지갑을 열어 5만 원권 몇 장을 건넸다.
“고마워요!”
딸이 방으로 들어간 뒤, 철호는 베란다로 나갔다.

40년 전, 그 지독한 열사의 땅에서 자신이 벌어온 달러가 아니었다면 이 아파트도, 딸의 저 해맑은 웃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돈에 묻어있는 땀과 눈물, 그리고 포기해야 했던 어떤 것에 대해서는.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단지 상가, 평소엔 보이지 않던 낡은 나무 문이 눈에 띄었다.


[시간의 다방]

문을 열자 훅, 하고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 냄새가 났다. 커피 볶는 냄새에 섞인 미세한 흙냄새.
실내는 어둑했고, 천장엔 낡은 선풍기 하나가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물 한 잔 주쇼. 시원한 걸로.”

철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맞은편 의자에 누군가 인기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몸빼 바지에 낡은 카디건을 걸친, 뽀글머리 파마를 한 중년의 여인.

“철호야, 덥지? 여긴 얼음물도 귀한데.”

투박한 사투리. 철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머니. 2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40년 전의 젊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엄... 엄마?”

“우리 아들, 얼굴이 와 이리 까맣노. 밥은 묵었나? 김치는 입에 맞나?”

어머니는 봇짐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찌그러진 깡통에 담긴 볶음김치, 마른 오징어, 그리고 꼬깃꼬깃 접힌 편지 한 통.


1982년. 사우디 건설 현장 막사로 배달되던 그 소포였다.

쉰내가 푹푹 나는 그 김치 하나에 밥을 비벼 먹으며 흘렸던 눈물.

“니가 보내준 돈으로 빚도 갚고, 동생들 학비도 냈다. 근데 철호야, 니는? 니 청춘은 어데 갔노?”

어머니의 질문에 철호는 말문이 막혔다.
스물셋. 한창 연애하고 놀러 다닐 나이에 그는 50도가 넘는 사막에서 철근을 날랐다.

물 한 모금이 금보다 귀했고, 전갈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쪽잠을 잤다.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산업 전사’라는 그럴듯한 타이틀 뒤에 숨겨진 건 지독한 외로움과 육체적 고통뿐이었다.

“힘들었어, 엄마. 너무 힘들어서... 밤마다 사막 한가운데서 고함치고 싶었어. 나도 집에 가고 싶다고.”

철호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어머니가 거친 손으로 철호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안다, 내 새끼 고생한 거 내가 다 안다. 자, 커피 한 잔 마셔라.”

어머니가 내민 쟁반. 설탕, 프림, 블랙.

“설탕을 넣으문, 니가 사우디 가기 전으로 돌아간다. 안 가도 된다. 그냥 촌에서 농사짓고 살아도 우리 식구 밥은 굶지 않았을 끼다. 니 첫사랑 미숙이랑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거다.”

철호의 눈이 흔들렸다. 미숙이. 사우디 가겠다는 말에 울며 매달리던 그녀. 3년을 못 기다리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지만, 원망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때 가지 않았다면?

“프림을 넣으문, 니 몸뚱이 하나는 편하게 해 줄꾸마. 평생 일만 하다가 골병든 몸 싹 낫게 하고, 자식들 눈치 안 보고 살게 해 줄게.”

“아무것도 안 넣으문... 그냥 지금처럼 사는 기다. 니가 번 돈으로 자식들 키우고, 그 자식들이 또 지 자식 키우는 거 보면서. 섭섭해도 어쩌겠노, 그게 애비 팔자인기라.”

철호는 설탕을 집어 들었다. 미숙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 뜨거운 사막의 열기,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사우디에서 보낸 돈으로 남동생은 의사가 됐고, 여동생은 교사가 됐다. 그가 흘린 땀방울이 가족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 자부심 하나로 버텨온 40년이었다. 그걸 부정하면, 박철호라는 인간의 생은 무엇이 남는가.

“엄마.”

철호는 설탕을 내려놓았다.

“나 안 돌아갈래. 미숙이도 보고 싶고, 사막도 지긋지긋하지만... 내가 도망쳤으면 우리 식구들 다 뿔뿔이 흩어졌을 거 아냐. 나 하나 고생해서 다들 사람답게 살았으면 된 거지.”

그는 까맣고 쓴 커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막 밤하늘에 쏟아지던 별은 참 예뻤어. 엄마 생각하면서 보던 그 별들은 평생 못 잊을 거야.”

철호는 블랙커피를 마셨다. 혀끝에 닿는 쓴맛이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까끌까끌했지만, 목 넘김 뒤에는 깊은 풍미가 올라왔다. 그것은 '가장의 무게’를 견뎌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맛이었다.

“우리 아들, 장하다. 참말로 장하다.”

어머니가 철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서, 철호는 눈을 감고 그 온기를 가슴에 새겼다.

“잘 있어라, 엄마. 또 올게.”
“오냐, 밥심으로 사는 기다. 밥 잘 챙겨 묵고.”


눈을 떴을 때, 철호는 아파트 단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여름의 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딸이었다.
“아빠! 아까 준 용돈 너무 많아요. 반은 돌려드릴게요.”
“됐다. 가서 맛난 거 사 먹고, 사진이나 많이 찍어 보내.”

전화를 끊은 철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뜨거운 태양. 하지만 더 이상 숨 막히지 않았다.

저 태양 아래서 자신은 가장 치열하게 빛났었으니까.
그는 벌떡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아내에게 줄 시원한 수박 한 통 사러 가야겠다.




[작가 노트]
80년대 '중동 건설 붐’의 주역이었던 우리의 아빠, 형님들. 저희 막내 작은 아버지께서도 젊은 나이에 사우디에 가셔서 열심히 일하시다가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 하셨어요. 주인공 철호에게도 '사우디’는 청춘을 저당 잡힌 고통의 공간이자, 동시에 가족을 일으켜 세운 훈장 같은 기억입니다. 그가 과거의 사랑(설탕) 대신 현재의 가족(블랙)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어머니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단순한 '돈벌이 기계’가 아닌, 가족을 사랑했던 뜨거운 청년이었음을 위로받습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