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금남로의 셔터는 내려가지 않았다

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by 공감디렉터J


“아따, 거참 비 한번 징하게 쏟아지네잉.”

김진수(66세) 씨는 택시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을 닦으며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광주 시내를 관통하는 금남로 빗길.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빗물을 닦아내지만, 그의 시야를 흐리는 건 빗물이 아닌 오래된 환영들이었다.

1980년 5월. 바로 이 길이었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던 최루탄, 귀를 찢는 총성, 그리고...
“형!” 하고 부르던 목소리.

진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손님도 없는데 빈차 표시등만 붉게 빛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도지는 환청이었다. 머리를 식히려 들어간 골목길, 오래된 극장 옆에 낯선 간판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흐미, 이런 데 다방이 있었나?”

우산을 접고 들어선 실내는 묘하게 서늘했다. 습기 찬 바깥 공기와는 다른, 마치 오래된 서고에 들어온 듯한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

“어서 오세요. 늦었네요.”

안쪽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교련복. 얼룩무늬 교련복에 명찰을 달고, 머리엔 붕대를 감은 앳된 고등학생이었다. 진수는 숨이 턱 막혔다.

“지... 진호냐?”

그럴 리가 없다. 진호는 죽었다. 아니, 실종됐다.


80년 5월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던 날. 시위대에 주먹밥을 나르겠다며 나간 뒤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 내 동생. 45년이 지났는데, 녀석은 여전히 열일곱 살의 모습으로 거기 앉아 있었다.

“형, 배고프다.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 먹고 싶네.”

진호는 씩 웃으며 진수에게 자리를 권했다. 진수는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꿈인가. 꿈이라도 좋다.

“너... 너, 어디 갔었어! 엄마가... 엄마가 너 찾다가 눈도 못 감고 가셨는데!”

진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45년 묵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형. 근데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여기 좀 봐.”

진호가 가리킨 창밖. 놀랍게도 창밖은 비 오는 2025년의 광주가 아니었다. 1980년 5월의 금남로였다.

트럭에 올라타 태극기를 흔드는 시민들, 주먹밥을 나눠주는 아주머니들, 부상자를 업고 뛰는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조준하는 군인들의 서늘한 총구.

“형은 봤잖아.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 사이로, 끝까지 문을 닫지 않고 부상자들을 숨겨주던 사람들을. 피가 부족하다니까 병원으로 달려가 팔을 걷어붙이던 사람들을.”

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 속에 있었다. 택시를 몰고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며, 피 묻은 시트 위에서 오열했었다. 하지만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 모든 자부심을 집어삼켰다.

“형, 이제 선택해야 해.”

진호가 커피가 놓인 쟁반을 밀었다.

“설탕을 넣으면 1980년 5월 20일로 돌아가. 나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막을 수 있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숨죽이고 살면 돼. 그럼 난 살아서 형이랑 늙어갈 수 있겠지.”

“프림을 넣으면, 이 지독한 기억이 모두 사라진 미래로 보내줄게. 5월이 와도 가슴이 뛰지 않고, 비가 와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평온한 세상으로.”

“아무것도 넣지 않으면... 형은 다시 빗속의 택시 운전사가 되어야 해.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고, 5월만 되면 아파하면서. 하지만 기억해야 해. 형이 본 그날의 진실을.”

진수는 떨리는 손으로 설탕을 집었다. 진호를 살릴 수 있다. 비겁해져도 좋다. 동생만 살릴 수 있다면 역사 따위, 정의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진수는 창밖을 보았다. 피 흘리며 쓰러진 청년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어머니, “전두환은 물러가라” 외치며 쓰러져가는 이름 모를 시민들. 그들이 흘린 피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했다는 것을, 진수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었다면?

“형, 비겁해도 돼. 나 살리고 싶잖아.”

진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수는 설탕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니... 아니다, 진호야.”

진수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살리고 도망치면... 저 거리에서 죽어간 수많은 진호들은 누가 기억하냐. 니가 목숨 걸고 지키려던 게 고작 우리 식구들만의 안위는 아니었잖냐.”

진수는 프림 통도 밀어냈다.

“잊지도 않을 거다. 편안해지겠다고 널 지우면, 그건 진짜로 널 두 번 죽이는 거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블랙커피를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쓰다. 혀뿌리가 아려올 만큼 지독하게 썼다.

“진호야. 형은 기억할게. 네가 못다 산 삶까지, 내가 짊어지고 갈게. 매년 5월이 오면 네 이름을 부르고, 내 택시에 타는 손님들에게 이야기해 줄게. 그해 5월, 광주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심장이었노라고.”

진호가 환하게 웃었다. 피 묻은 붕대가 사라지고, 말끔한 교복 차림의 건강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역시 우리 형이야. 땡큐 베리 감사.”

진호가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 서서히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잘 가라, 내 동생... 글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진수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다시 택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비는 그쳤고, 금남로의 가로수들이 빗물을 머금고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진수는 백미러 속 자신의 늙은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미터기를 꺾고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518번 버스가 옆을 지나갔다.

오늘따라 광주의 바람이 시원했다.




[작가 노트]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분기점인 5.18 광주 민주화운동. 주인공 진수에게 '동생을 살릴 수 있는 과거(설탕)'는 가장 강력한 유혹이지만, 그는 개인의 안위보다 '역사의 증인’으로 남는 고통스러운 현재(블랙)를 택합니다. 이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갖는 부채의식이자, 동시에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