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드르륵, 탁. 드르륵, 탁.
서울 창신동 비탈길, 낡은 수선집 '순자네 리폼’의 재봉틀 소리는 쉰여덟 해 동안 멈춘 적이 없다.
김순자(69세) 씨는 발판에서 발을 떼고 허리를 펴려다 “으으윽” 하는 신음과 함께 도로 주저앉았다.
비가 오려나. 손마디가 쑤시고, 허리께가 끊어질 듯 시큰거렸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 것조차 이제는 돋보기안경을 두 개나 겹쳐 써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요즘 젊은이들이 '워라밸’이니 '조용한 사직’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순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배가 불렀지. 우리 땐 오줌 눌 시간도 아까워서 물도 안 마셨는데.”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씁쓸함이 입안에 고였다. 가게 문을 닫고 나오는 길, 골목 어귀에 처음 보는 간판 불빛이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번졌다.
[시간의 다방]
'다방’이라는 두 글자가 묘하게 순자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믹스커피 말고, 누가 타 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한 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훅 끼쳐오는 것은 낡은 원단 냄새와 기름 냄새, 그리고 은은한 커피 향이었다. 내부는 어둑했지만 아늑했다. 천장이 낮아 마치 다락방 같았다.
“어서 오세요, 순자 누님.”
카운터 안쪽에서 뿔테 안경을 쓴 앳된 청년이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순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얼굴. 야윈 볼, 낡은 체크무늬 남방, 그리고 언제나 옆구리에 끼고 있던 두꺼운 법전.
“서... 선생님?”
70년대 평화시장, 먼지 구덩이 속에서 몰래 열리던 야학. '노동법’이라는 걸 가르쳐주겠다며 눈을 빛내던 대학생, 서 선생님이었다. 경찰이 들이닥치던 날, 여공들을 뒷문으로 내보내고 홀로 잡혀가던 그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손이... 많이 거칠어지셨어요.”
청년은 순자를 자개장이 놓인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순자는 자신의 뭉툭하고 굽은 손가락을 황급히 무릎 아래로 감췄다.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도 안 늙으셨네.”
“여기는 시간이 멈춘 곳이니까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청년이 내려놓은 쟁반에는 김이 오르는 커피와 설탕, 프림, 그리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티스푼이 놓여 있었다.
순자는 뜨거운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온기가 전해지자 꾹꾹 눌러 담았던 지난 세월의 응어리가 터져 나왔다.
“선생님, 저 기억나요? 7번 시다 순자. 그때 내 나이 열여섯이었어요.”
순자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닭장 같은 다락방이었죠.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1.5미터 높이의 작업장. 환풍기 하나 없어서 원단 먼지가 눈처럼 날렸어요. 그 먼지를 반찬 삼아 점심 도시락을 먹었지.”
그녀는 마른기침을 콜록거렸다. 평생을 달고 사는 기관지염이었다.
“졸면 안 되니까, 물량이 밀리면 안 되니까... 우리는 '타이밍’을 먹었어요. 잠 안 오는 약 말이예요. 그걸 먹으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떨리는데, 신기하게 눈은 말똥말똥해져요. 그렇게 며칠 밤을 새워서 미싱을 돌렸어요. 드르륵, 드르륵... 그 소리가 귀신 곡소리 같아서 울면서 돌렸어요.”
순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느 날 옆자리 미싱사 언니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반장은 기계 멈춘다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 선생님이 가르쳐줬죠.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때리던지.”
청년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순자의 거친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주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누님 덕분에, 누님들이 피땀 흘려 만든 그 옷들 덕분에 동생들이 학교 가고, 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겁니다.”
“그렇죠? 내 인생이 헛된 건 아니죠?”
“그럼요. 자, 이제 선택을 하실 수 있어요.”
청년이 쟁반을 가리켰다.
“설탕을 넣으면, 열여섯 꽃띠 순자로 돌아갑니다. 가난했지만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떡볶이를 사 먹던 시절로요. 야학에 다시 가서 공부도 하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도 있겠죠.”
“프림을 넣으면, 고단한 노동은 끝난 편안한 미래로 모십니다. 손가락 관절염도, 기침도 없는 곳에서 우아하게 쉬실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을 선택하시면... 지금의 아픈 몸과 기억을 안고 다시 그 수선집 문을 여셔야 합니다.”
순자는 설탕 그릇을 바라보았다. 돌아가고 싶었다. 허리가 펴지는 세상, 먼지 없는 공기, 뽀얗고 예쁜 손을 가진 소녀로. 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은 깨지고 지문은 닳아 없어진, 훈장 같은 상처들.
이 손으로 동생들 셋을 대학 보냈다. 이 손으로 남편의 병원비를 댔고, 이 손으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고통스러웠지만, 치열하게 지켜낸 나의 역사였다.
순자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검은 액체를 입으로 가져갔다.
“선생님. 저는 그냥 마실래요.”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쓰실 텐데요.”
순자는 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겁고 쌉싸름한 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써야죠. 인생이 원래 쓴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 쓴맛 뒤에 오는 구수한 맛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내가 도망치면, 그 시절 그 닭장 속에서 버텨낸 어린 순자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걔가 이 악물고 버텨서 지금의 내가 된 건데.”
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가 욱신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고마워요, 선생님. 나 오늘 밤은 잠 잘 올 것 같아.”
다방 문을 열고 나오자 비는 그쳐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상쾌하게 폐부로 들어왔다.
골목 끝, 낡은 수선집 간판이 깜빡거렸다.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드르륵, 미싱은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내일의 미싱 소리는 곡소리가 아닌, 당당한 삶의 행진곡일 것이다.
순자는 주머니 속에서 닳고 닳은 골무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작가 노트]
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의 여공들이 주인공입니다. '타이밍’이라는 각성제와 '닭장’이라 불리던 열악한 작업 환경은 당시의 처절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가끔 TV에서도 영상실록이라고 과거 방송 보여줄 때 종종 등장하곤 하죠. 주인공 순자가 과거(설탕)나 안락한 미래(프림)가 아닌, 고통스러운 현재(블랙)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희생으로 일궈낸 삶에 대한 ‘자부심’ 때문입니다. "내가 도망치면, 버텨낸 어린 순자가 불쌍하다"는 말은 현재를 살아가는 어른들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헌사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