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글루크 아우프(Glück auf), 검은 눈물

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by 공감디렉터J


종로 3가 뒷골목, 유독 해가 짧게 느껴지는 1월의 오후였다.
최 영감, 아니 최민석 씨(74세)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익숙한 거리를 헤맸다.

분명 이 근처였다. 50년 전, 독일로 떠나기 전날 친구들과 마지막 소주잔을 기울였던 그 순댓국집이 있던 자리.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낯선 프랜차이즈 카페와 높게 솟은 오피스텔뿐이었다.

“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분명 여기였는데...”

은퇴 후 남는 건 시간뿐이라지만,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헛헛했다.

며칠 전 뉴스에서 본 ‘독일 파견 광부 기념관 건립’ 소식 때문이었을까.

민석은 욱신거리는 무릎을 두드리며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골목 구석진 곳, 마치 세상의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듯 낡은 목재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의 다방]

간판 밑에는 작게 ‘당신의 시간을 추출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홀린 듯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짙은 커피 향, 그리고 어딘가 쿰쿰하면서도 그리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내부는 기묘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한다는 '레트로’풍이라기엔 지나치게 진짜 같았다.

붉은 벨벳 소파, 디제이 박스, 그리고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 손님은 민석뿐이었다.

카운터에는 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민석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마담이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꽤 멀리서 오셨네요.”
“아, 예... 뭐, 그냥 지나가다...”

민석은 구석 자리에 앉았다. 마담이 다가와 메뉴판 대신 낡은 놋쟁반을 내려놓았다. 그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과 각설탕 그릇, 프림 통이 놓여 있었다.

“주문은 안 했습니다만.”
“여긴 메뉴가 하나뿐이라서요. 그나저나, 얼굴에 검댕이 묻으셨네요. 아직도 잘 안 지워지시나 봐요.”

민석은 황급히 뺨을 문질렀다. 묻어나는 건 없었다. 하지만 마담의 그 말은 민석의 심장 깊은 곳, 봉인해 두었던 기억의 빗장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검댕. 지하 1,000미터 막장. 그 지독한 석탄 가루.

마담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힘드셨죠? 그 좁은 갱도에서.”

민석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낯이 익었다.

'누구지? 아, 그래! 파독 간호사였던 영희.'

베를린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나 한국말로 길을 물으며 울먹이던, 수줍음 많던 그 여대생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당신... 영희 씨?”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일 뿐.”

그녀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민석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차마 다 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1970년이었소. 스물다섯, 한창때였지. 가난이 지겨웠어. 형이랑 동생들 학비는 벌어야 했고. 나라에서 독일 가면 돈을 많이 준다길래... 비행기 트랩에 오를 때 애국가 부르면서 울던 기억이 나.”

민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독일 루르 지방의 탄광은 지옥이었어. 지하 1,000미터. 온도는 40도가 넘고, 숨 쉴 때마다 석탄 가루가 폐부로 들어와 박혔지. ‘글루크 아우프(Glück auf)’. 살아서 돌아오라는 그 인사가 하루 일과였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앙상해진 손을 내려다봤다.

“그날도 그랬어. 1971년 겨울. 내 사수였던 한스, 그리고 동료였던 철수... 갱도가 무너졌지. 나는 운 좋게 틈새에 끼어 살았지만, 철수는... 철수는 내 눈앞에서 매몰됐어.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으며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해. ‘형, 우리 엄마한테 나 돈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고 잘 산다고, 걱정 말라고 전해줘.’ 나는 그 약속을 못 지켰어. 무서워서 도망치듯 귀국했거든.”

민석의 눈가에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50년을 묵혀온 죄책감이었다.

“열심히 살았어. 그 친구 몫까지. 한국 와서 안 해본 일이 없어. 덕분에 자식들 대학 보내고 번듯한 아파트도 샀지. 그런데... 밤마다 꿈을 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철수가 날 부르는 꿈을.”

마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 치열하게 살아내셨네요. 자, 이제 선택할 시간이에요.”


그녀가 쟁반 위의 설탕과 프림을 가리켰다.

“설탕을 넣으면, 그 시절 가장 달콤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철수를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사고가 나기 전, 맥주 한 잔에 미래를 꿈꾸던 그때로.가서 그 친구를 구할 수도 있겠죠.”

“프림을 넣으면, 이 죄책감이 사라진 평온한 미래로 가실 수 있어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안식처로요.”

“아무것도 넣지 않으면, 이 쓴 커피 맛 그대로... 지금의 민석 씨로 살아가셔야 해요. 여전히 아픈 무릎과, 밤마다 찾아오는 죄책감을 안고서요.”

민석의 손이 떨렸다. 설탕. 달콤한 유혹이었다. 철수를 살릴 수 있다면. 그 끔찍한 사고를 막을 수만 있다면 내 50년의 세월쯤은 기꺼이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고 싶소. 그 친구,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어.”

민석은 떨리는 손으로 각설탕 두 개를 집어 커피 잔에 떨어뜨렸다.
퐁당, 퐁당.
검은 수면 위로 파동이 일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잘 저어 드세요. 바닥까지 녹을 때까지.”


마담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민석은 스푼으로 커피를 휘저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빨라졌다. 째깍째깍째깍-. 주변의 풍경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낡은 다방의 벽이 허물어지고, 차가운 잿빛 하늘과 웅장한 기계 소음이 들려왔다.

“민석이 형! 뭐 해? 빨리 옷 갈아입고 나가자. 오늘 월급날이잖아!”

익숙한 목소리. 젊고 생기 넘치는 얼굴. 철수였다.
석탄 가루가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철수가 민석의 어깨를 툭 쳤다.

민석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지고 거칠었던 70대의 손이 아닌, 굳은살이 박여 있지만 힘줄이 툭 불거진 20대의 손이었다.

독일, 1970년. 루르 공업지대.
젊음은 돌아왔다. 그리고 잔인한 운명의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민석은 눈앞의 철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영문을 모르는 철수는 “형, 왜 이래? 징그럽게!” 하며 웃어젖혔다.

그 따뜻한 체온. 살아있었다.

‘이번엔... 이번엔 절대 널 놓치지 않으마.’

민석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20대의 뺨을 적셨다.

다방에서 마신 커피의 설탕 맛이, 입안에서 쓰도록 달게 느껴졌다.




[작가 노트]
첫 화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이 되었던 파독 광부들의 희생과 트라우마를 다루었습니다. '글루크 아우프(살아서 돌아오라)'라는 인사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이 '설탕’을 선택해 과거로 돌아간 것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평생을 짓눌러온 부채감을 씻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입니다. 과연 과거로 돌아간 민석은 철수를 구하고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정해진 운명 앞에 또다시 무릎 꿇게 될까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