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오래된 라디오에서 코리아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박만수(65세) 씨는 재개발을 앞둔 텅 빈 달동네 어귀, 자신이 30년 넘게 운영해 온 ‘만수 설비’ 가게 앞 평상에 앉아 멍하니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잠실 롯데타워가 바벨탑처럼 솟아 있었다.
1988년, 저 자리에 올림픽 스타디움이 들어서고 온 세계가 서울을 주목했을 때, 만수의 세상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올림픽이다 뭐다 해서 싹 다 밀어버렸지. 보기 흉하다고.”
만수는 씁쓸하게 막걸리 잔을 비웠다. 며칠 뒤면 이 가게도,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삶의 터전도 포크레인 삽날 아래 사라질 것이다.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며 골목을 내려오는데, 철거 예정 딱지가 붙은 빈집들 사이에 불 켜진 간판 하나가 보였다.
[시간의 다방]
“귀신에 홀렸나. 여기 다 나갔는데.”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내부는 뜻밖에도 훈훈했다. 연탄난로 위에 주전자가 끓고 있었고, 구석엔 1988년 호돌이 마스코트 인형이 놓여 있었다.
“왔어? 반장님.”
난로 옆, 낡은 점퍼를 입고 목장갑을 낀 사내가 쭈그리고 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 험상궂은 눈매.
만수는 숨을 멈췄다.
최 씨. 88년 당시 상계동 철거 현장의 용역 반장.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만수의 집을, 만수의 부모님이 피땀 흘려 지은 판잣집을 부수던 그 악마 같은 사내.
“네가... 네가 왜 여기 있어!”
만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날, 용역들이 들이닥쳐 가재도구를 집어 던지고 아버지를 밀쳐 쓰러뜨리던 그 지옥 같던 새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진정해, 박만수. 나도 밥은 먹고 살아야지.”
최 씨는 킬킬거리며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험상궂은 얼굴 뒤로 묘한 슬픔이 비쳤다. 그는 목장갑을 벗었다. 손가락 두 개가 없었다.
“나도 그때 우리집 가장이었어. 위에서 시키니까, 안 하면 내 새끼들이 굶으니까. 욕먹고 돌 맞으면서 니네 집 부쉈지. 그러다 사고로 손가락도 날리고. 결국 나도 팽당했어. 그 잘난 올림픽 끝나고 나니까 우린 쓰레기 취급이더라고.”
최 씨가 쟁반을 내밀었다.
“자, 선택해라. 억울한 박만수.”
“설탕을 넣으면 1988년 9월 17일 개막식 날로 돌아가. 굴렁쇠 소년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그 평화로운 순간. 넌 철거민이 아니라 올림픽을 즐기는 관중이 될 수 있어. 미리 땅을 사둬서 보상금 두둑이 챙긴 졸부로 살게 해 줄게.”
“프림을 넣으면, 다 잊게 해 준다. 철거의 공포도, 가난의 설움도 없는 2050년의 미래 도시로 가. 거기선 집 걱정 없이 편하게 살 수 있어.”
“아무것도 안 넣으면... 넌 내일 아침 포크레인 소리에 깨야 해. 또다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거지. 지긋지긋하지 않냐?”
만수는 설탕을 보았다. 졸부. 보상금.
평생을 ‘집 없는 설움’ 속에 살았다.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전화에 가슴 졸이고, 이사 갈 때마다 아이들의 전학 문제로 속을 끓였다. 만약 그때 부자였다면, 내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만수의 눈에 최 씨가 입고 있는 점퍼의 흙투성이 자국이 들어왔다. 그리고 창밖, 철거 딱지가 붙은 자신의 가게.
그 좁은 가게에서 밤낮으로 보일러를 고치고, 막힌 변기를 뚫으며 만수는 삼 남매를 키웠다.
비록 판잣집은 잃었지만, 그는 정직한 노동으로 다시 일어섰다. 88년의 그 절망 속에서도, 이웃들과 천막을 치고 서로 밥을 나눠 먹으며 버텼던 그 끈끈한 연대. 그것이 박만수를 만들었다.
“이봐, 최 반장.”
만수는 설탕을 밀어냈다.
“돈? 좋지. 근데 내가 사기 쳐서 번 돈도 아니고, 내 기술로 내 땀으로 번 돈이라 떳떳해. 너희들이 집은 부쉈어도, 우리 식구들 사랑까지는 못 부쉈어.”
만수는 프림도 거절했다.
“미래? 도망 안 가. 내일 포크레인이 와도, 난 또 다른 데 가서 설비 가게 열 거야. 내 기술이 있는데 뭐가 겁나냐.”
그는 검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쓰다. 88년 그해 겨울, 천막촌에서 마시던 식은 커피처럼 쓰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쓴맛 끝에 묘한 구수함이 올라왔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훈장 같은 맛이었다.
“그리고 너. 너도 고생했다. 너라고 뭐 좋아서 깡패짓 했겠냐. 시대가 미쳐 돌아갔던 거지.”
만수가 최 씨의 어깨를 툭 쳤다. 최 씨의 눈이 커졌다.
“너... 진짜 독한 놈이네. 박만수.”
최 씨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88년 서울 하늘의 불꽃놀이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잘 살아라! 이번엔 쫓겨나지 말고!”
다방을 나서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을 때렸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철거 예정지 붉은 페인트 글씨 위로 아침 햇살이 비쳤다.
만수는 가게 셔터를 올렸다. 드르륵, 쇳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어이, 박 사장! 일찍 나왔네?”
옆집 세탁소 김 씨가 하품을 하며 나왔다.
“아, 김 사장. 오늘 이사지? 내가 짐 좀 거들어 줄게.”
만수는 장갑을 꼈다. 1988년엔 쫓겨났지만, 2025년의 박만수는 쫓겨나는 게 아니다.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의 손엔 여전히 몽키 스패너가 들려 있었고, 그것은 굴렁쇠보다 더 힘차게 인생을 굴리는 도구였다.
[작가 노트]
88 서울 올림픽의 화려한 빛 뒤에는 어느 곳이고 철거민들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국가적 경사라는 미명 아래 삶의 터전을 짓밟혔던 도시 빈민들. 주인공 만수는 가해자였던 용역 반장을 만나지만, 그 또한 시대의 피해자였음을 깨닫고 용서합니다. '설탕(졸부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노동으로 일궈낸 현재(블랙)를 긍정하는 만수의 태도는, 물질적 풍요보다 중요한 '삶의 존엄’에 대한 멋진 선택은 아니었을까. 굴렁쇠 소년의 평화로운 이미지와 철거 현장의 폭력적인 자화상은 80년대의 명암처럼 느껴집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