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딩- 딩~~”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
버스킹을 하는 젊은이의 기타 소리가 퇴근길 인파를 뚫고 오미숙(62세) 씨의 귓가에 꽂혔다.
미숙은 걸음을 멈췄다.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그리고 통기타 하나.
노래는 서툴렀지만, 그 열기만은 뜨거웠다.
“저 나이 땐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만 들어도 노래가 나왔지.”
미숙은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고쳐 쥐었다. 콩나물, 두부, 남편이 좋아하는 고등어 한 손.
지금의 오미숙은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동네 문화센터 노래교실 반장이다.
하지만 40년 전 그녀는 '신촌의 존 바에즈’라 불리던 대학가요제 예선 탈락자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 골목 안쪽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에 이끌렸다.
[시간의 다방]
문을 열자마자 훅, 하고 밀려오는 건 LP판 튀는 소리와 담배 연기, 그리고 묵직한 원두 향이었다.
벽면 가득 꽂힌 레코드판. 김민기, 양희은, 들국화... 그녀의 청춘을 지배했던 이름들.
“참가 번호 17번, 오미숙 양. 준비됐나요?”
무대처럼 꾸며진 다방 한구석, 마이크 앞에 뿔테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깐깐해 보이는 표정. 1984년 대학가요제 예선 심사위원이었던 그 교수님이었다.
“교... 교수님?”
“목소리가 많이 탁해졌군. 생활에 찌든 소리야.”
심사위원은 냉정하게 말했다. 미숙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날, 예선 무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기타 코드를 틀리고, 고음에서 삑사리가 났다.
땡! 하는 실로폰 소리와 함께 그녀의 꿈도 끝났다. 그 후로 미숙은 기타를 놓았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노래는 설거지할 때나 흥얼거리는 노동요가 되었다.
“그때 만약 실수를 안 했다면, 난 가수가 됐을까요?”
미숙이 물었다. 심사위원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가리켰다.
“자, 다시 한번 튜닝할 기회를 주지.”
“설탕을 넣으면 1984년 예선장 대기실로 돌아가. 넌 긴장하지 않고 완벽하게 노래를 불러. 본선에 진출해서 대상을 받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가 될 거야. 앨범도 내고, 콘서트도 하고.”
“프림을 넣으면, 노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지워줄게. ‘내가 가수가 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 따위 안 하는, 그저 만족스러운 전업주부의 삶을 살게 해 주지.”
“아무것도 안 넣으면... 넌 여전히 노래교실 반장 오미숙이야. 스타는 아니지만, 동네 아줌마들 앞에서 탬버린 흔들며 노래하는 게 전부인 인생.”
미숙은 설탕을 집어 들었다.
무대. 조명. 관객들의 환호. 평생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그 갈망.
TV에 나오는 또래 가수들을 보며 ‘나도 저기에 있을 수 있었는데’ 하며 삼켰던 쓴물.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찬란했던 무대 위로.
하지만...
미숙의 눈에 굳은살 박인 자신의 손끝이 들어왔다. 기타 줄 대신 행주를 짜고, 걸레를 빨며 굳어진 손.
그 손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의 쳐진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고 지난주, 요양병원의 치매 걸린 어머니 앞에서 노래를 불러드렸을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맑은 눈으로 웃어주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노래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내 가족의 귓가에는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교수님.”
미숙은 설탕을 내려놓았다.
“저요, 스타는 안 할래요. 그 화려한 무대, 좋죠. 근데요... 내 노래 듣고 우리 애가 자장가처럼 잠들고, 우리 남편이 힘내서 출근하고, 우리 엄마가 웃어줬어요. 내 무대는 거실이었고, 부엌이었고, 병실이었어요. 관객은 적지만, 진심으로 내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녀는 블랙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삑사리 좀 나면 어때요. 그게 인생이지. 완벽하지 않아서 더 부를 맛 나는 거 아니겠어요?”
미숙은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구석에 놓인 통기타를 집어 들었다.
40년 만에 잡아보는 넥의 감촉. 코드를 잡는 손가락이 조금 뻣뻣했지만, 기억은 손끝에 남아 있었다.
징~~~.
C코드. 맑고 투명한 소리가 다방을 채웠다.
“저, 노래 한 곡 하고 갈게요. 심사 좀 다시 봐주세요.”
미숙은 눈을 감고 노래를 시작했다. ‘아침 이슬’. 기교도 없고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 울림만은 어느 가수보다 깊었다. 삶의 무게를 견뎌낸 자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심사위원은 말없이 눈을 감고 듣더니, 조용히 박수를 쳤다.
“합격입니다. 오미숙 씨.”
다방을 나왔을 때,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미숙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장바구니가 가벼웠다.
집에 가서 기타를 다시 꺼내야겠다. 이번 주말엔 손녀에게 기타를 가르쳐줘야지. 나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2절이다.
[작가 노트]
80년대 청춘문화의 상징인 '대학가요제’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이야기. 주인공 미숙은 '스타가 될 수 있는 과거(설탕)'를 거부하고, 일상 속에서 소박하게 피어난 자신의 예술혼(블랙)을 긍정합니다. "내 무대는 거실이었고, 관객은 가족이었다"는 고백은 평범한 주부들의 삶이 결코 실패일 리 없겠죠. 화려한 성공이 아닌, 삶의 애환을 노래로 승화시키는 중년의 모습은 단단함 그 자체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