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여보, 이거 봐.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 또 받는다는데...”
TV 뉴스 자막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김상철(72세) 씨는 신문을 보던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 이제 와서 뭔...”
말끝을 흐렸지만, 상철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1983년 여름.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웠던 눈물바다. KBS 앞마당부터 벽까지 빼곡히 붙어있던 사연판들.
그리고 밤새 흘러나오던 패티김의 노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상철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북녘 어딘가에도 이 바람이 불까.
1.4 후퇴 때, 다섯 살이던 상철의 손을 놓쳐버린 여동생 순이.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순이의 이름을 부르다 눈을 감으셨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섰다. 텅 빈 공터, 바람에 날리는 전단지들 사이로 낯선 불빛이 일렁였다.
[시간의 다방]
다방 문을 열자마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대전에서 온 김씨요!”, “함경남도 흥남 철수 때 헤어진 우리 오빠 찾습니다!”
1983년 6월 30일,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현장음이었다. 흑백 TV 여러 대가 쌓여 있고, 화면 속에선 낯익은 아나운서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오빠...?”
구석진 테이블. 낡은 한복을 입은, 깡마른 소녀가 앉아 있었다. 단발머리에 빨간 댕기.
전쟁통에 헤어질 때 입고 있던 그 옷 그대로였다.
“수... 순이야?”
상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7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다섯 살 순이가 거기 있었다.
“오빠, 나 배고파. 엄마는 어디 갔어? 왜 나만 두고 갔어?”
순이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상철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날, 흥남 부두. 피난민 인파에 밀려 넘어지면서 놓쳐버린 그 작은 손.
“오빠!” 하고 부르던 비명소리가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명(耳鳴)이 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때도, 순이는 어딘가에서 떨고 있을 거란 생각에 죄스러웠다.
“미안하다... 오빠가 잘못했다.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상철은 오열했다. 소녀 순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쟁반을 밀어주었다.
“울지 마, 오빠. 자, 커피 마셔.”
“설탕을 넣으면 1950년 겨울, 흥남 부두로 돌아가. 이번엔 내 손 절대 놓지 마. 밧줄로 꽁꽁 묶어서라도 같이 배를 타. 그럼 우리 남한에서 같이 학교 다니고, 같이 늙어갈 수 있어.”
“프림을 넣으면, 날 잊게 해 줄게. 전쟁의 트라우마도, 죄책감도 없는 세상. 오빠 혼자라도 맘 편히 살 수 있게.”
“아무것도 안 넣으면... 오빠는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해. 생사도 모르는 나를 기다리면서, 통일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막막한 세월을 견뎌야 해.”
상철은 설탕을 집으려 했다. 순이를 살릴 수 있다. 어머니의 한을 풀 수 있다. 그 지옥 같은 이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수명 따위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
하지만...
상철의 머릿속에 1983년, 여의도 광장에서 목격한 기적 같은 만남들이 스쳐 지나갔다.
서로 얼싸안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울부짖던 사람들. 비록 헤어져 살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생존해낸 그 끈질긴 생명력.
만약 과거를 바꾼다면, 지금의 내 아내, 내 자식들, 그리고 내가 대한민국에서 일궈온 이 모든 삶은 어떻게 되는 건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현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이야.”
상철은 설탕을 내려놓았다.
“내가 과거로 가서 널 데려오면... 북쪽에 남겨질지도 모르는 너의 또 다른 가족은 어떡하니. 네가 거기서 결혼해서 낳았을지도 모르는 자식들은? 그들의 존재까지 내가 지울 순 없어.”
상철은 떨리는 손으로 블랙커피를 들었다.
“오빠는 기다릴게. 설령 내가 죽어서라도, 통일이 되는 그날 영혼으로라도 널 만날게. 잊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는 게 오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다.”
그는 쓴 커피를 삼켰다. 목이 메어왔다. 분단의 고통처럼 쓰고 아렸다. 하지만 그 쓴맛 속에 묘한 희망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아니 만나야만 한다는 간절함.
“역시 우리 오빠네. 씩씩하다.”
소녀 순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어른으로 변해갔다. 주름진 얼굴, 하얗게 센 머리. 북녘 어딘가에서 늙어갔을 순이의 현재 모습이었다.
“건강하시라요, 오빠. 꼭 다시 만납시다.”
순이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다방을 나오자, 밤하늘에 반달이 떠 있었다. 반쪽짜리 달. 하지만 언젠가는 둥글게 차오를 달.
상철은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신청서 가져와 봐. 한 번 더 해보자. 죽기 전에 얼굴은 봐야지.”
상철은 볼펜을 꾹 눌러 썼다.
찾는 사람: 김순이. 관계: 여동생.
종이 위에 떨어진 눈물 자국이 번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 해도, 그것은 사랑이었다.
[작가 노트]
9화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분단의 아픔과 혈육의 정을 다뤘습니다. 주인공 상철에게 '순이를 데려올 수 있는 과거(설탕)'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지만, 그는 역사의 순리(블랙)를 따릅니다. 이는 과거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통일의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였을 겁니다.
반쪽짜리 달처럼 불완전하지만, 언젠가 하나가 될 것을 믿으며 기다리는 그분들의 간절함이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