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여권 도장에 찍힌 자유의 무게

시간의 다방 : 청춘의 온도 100℃

by 공감디렉터J


인천공항 제2터미널.
여행용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거대한 홀을 울렸다.

박영호(64세) 씨는 출국 심사대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어르신, 모자 좀 벗어주시겠어요?”
심사관의 말에 모자를 벗자, 휑한 정수리가 드러났다. 영호는 멋쩍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권을 펼쳤다. 수많은 도장들이 찍혀 너덜너덜해진 사증란.
하지만 이 수많은 도장들 중, 1989년. 그해 처음 찍혔던 그 파란 도장만큼 심장을 뛰게 했던 것은 없었다.

‘해외여행 자유화.’
그 뉴스를 듣자마자 적금을 깼던 서른 살의 영호. 김포공항에서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을 때의 그 전율. '세상은 넓었고, 나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지금, 은퇴 기념으로 떠나는 이 여행은 왜 이리 무겁기만 할까.
잠시 화장실을 찾던 영호의 눈에 낯선 표지판이 들어왔다.


[시간의 다방]

화살표를 따라간 곳은 공항 구석진 곳, 직원용 통로 같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문을 열자, '탑승 중(Boarding)'이라는 붉은 네온사인이 깜빡이고 있었다. 기내식 냄새와 커피 향이 섞인 묘한 냄새.

“손님, 탑승하시겠습니까?”

창구 안쪽, 제복을 입은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촌스러운 어깨뽕이 들어간 유니폼, 짙은 화장.

1989년 김포공항 카운터에서 영호의 여권을 받아들던 그 직원이었다.

“저... 파리행인가요?”
“목적지는 손님이 정하시는 겁니다.”

직원은 쟁반을 내밀었다. 커피 잔 옆에는 여권처럼 생긴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설탕을 넣으시면 1989년, 첫 해외여행을 떠나던 그날로 돌아갑니다. 에펠탑 아래서 만난 프랑스 여자와 사랑에 빠져 그대로 눌러앉을 수도 있겠죠. 한국에서의 지루한 직장 생활, 꼰대 상사, 그리고 훗날 겪게 될 IMF 따위 다 잊고 보헤미안처럼 사는 겁니다.”

“프림을 넣으시면, 2050년의 미래로 모십니다.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 늙고 병든 몸 대신 젊은 아바타를 타고 화성을 여행하며 영원한 쾌락을 즐기실 수 있어요.”

“아무것도 안 넣으시면... 그냥 이 60대 은퇴자의 몸으로 패키지여행을 가셔야 합니다. 가이드 깃발만 쫓아다니며 빡빡한 일정에 시달리는, 무릎 아픈 효도 관광이죠.”


영호는 설탕을 만지작거렸다. 1989년의 파리. 센 강변의 낭만. 그때 귀국하지 않았다면?
사실 그는 파리에서 화가가 되고 싶었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3개월 관광 비자가 끝나갈 무렵, 한국의 부모님은 "빨리 들어와서 장가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결국 그는 돌아왔고, 30년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다. 넥타이에 목이 졸린 채, 가끔 여행 프로를 보며 소주를 마시는 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돌아가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영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떠났어야 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어야 했다.
하지만…


영호는 자신의 낡은 여권을 다시 펼쳐보았다.
2005년 중국(출장), 2010년 베트남(가족여행), 2018년 일본(딸 졸업 여행)...
이 도장 하나하나에 내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버텼기에, 내 딸이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아내와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닐 수 있었다.
나의 자유를 저당 잡혀 가족의 행복을 샀다. 그것이 억울한가?


“아니.”

영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내가 파리에 남았다면... 난 고독한 예술가는 됐겠지만, 내 딸 지민이가 태어나는 순간의 그 벅찬 감동은 몰랐겠지. 퇴근길에 아내가 끓여놓은 된장찌개 냄새의 안락함도 몰랐겠지.”

영호는 설탕을 내려놓았다.

“내 30년의 직장 생활, 감옥이 아니었어. 그건 내가 선택한 또 다른 여행이었어. '가장’이라는 이름의,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견디는 아주 긴 여행.”

그는 블랙커피를 집어 들었다.

“이젠 진짜 자유야. 가이드 깃발? 따라가지 뭐. 무릎이 아프면 쉬었다 가면 되고. 내 발로 걷고, 내 눈으로 보는 지금 이 순간이 진짜 내 여행이야.”

영호는 커피를 마셨다. 씁쓸했지만 깔끔했다. 3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박영호 님.”

직원이 여권에 쾅, 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DEPARTURE: 2025. PRESENT]


다방 문을 열고 나오자, 공항 안내 방송이 들렸다.
“파리행 KE901편 탑승을 시작합니다.”

영호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여보, 가자. 에펠탑 보러.”
“당신 무릎 괜찮겠어? 파스 챙겼어?”
“걱정 마. 나 아직 청춘이야.”

영호는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30년 전의 설렘과는 달랐다. 더 묵직하고, 더 단단한 설렘이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그의 진짜 인생 여행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시즌 1의 마지막 화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소재로, '자유’와 ‘책임’ 사이에서 갈등했던 세대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주인공 영호는 과거의 꿈(예술가)을 포기하고 현실(가장)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희생이 아닌 '또 다른 여행’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자유를 저당 잡혀 가족의 행복을 샀다"는 독백은 대한민국 5060 아버지들의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은퇴라는 새로운 티켓을 쥔 그들에게, "지금이 진짜 여행의 시작"이라며 따뜻한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로써 격동의 70~80년대를 다룬 시즌 1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시즌 2에서는 90년대, 풍요와 추락이 공존했던 X세대의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