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각성

[시즌 1] 어느 은퇴자의 은밀한 취미생활

by 공감디렉터J


기철의 한마디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끊어낸 듯 황 노인의 어깨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장 사장, 니가 우째 아노? 우리 진호 목소리 맞다! 지금 구속된다 안 카나!”

황 노인은 폴더폰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기철은 이미 황 노인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나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력으로 제압한 상태였다. 그는 황 노인의 손아귀에서 부드럽게 폰을 낚아챘다.

“어르신, 진호 씨 지난달에 승진해서 부서 이동했잖아요. 영업직에서 내근직으로요.”
“어... 어? 그... 글나?”

황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철은 폰의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아빠! 왜 아무 소리 안 해! 돈 보냈어? 나 진짜 죽는다고!”)

황 노인이 울먹이며 다시 폰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기철이 서늘한 목소리로 수화기를 향해 말했다.

“어이.”

(“......누구야, 당신. 아빠는?”)
갑작스러운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놈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진호야, 너희 회사 어제 창립기념일이라 전 직원 속초로 워크숍 갔잖아. 거래처 놈들이랑 시비가 붙었다고? 속초 앞바다 횟집에서?”

기철은 인쇄소에서 명함을 파주며 덤으로 듣던 시장 상인들의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황 노인이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아들 진호의 최근 근황도 마찬가지였다.

수화기 너머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딥페이크로 만들어낸 가짜 진호의 목소리를 송출하던 프로그램이 일시 정지된 듯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이 새끼야. 끊어.”


뚜- 뚜- 뚜---

전화가 끊어졌다. 황 노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생 폐지를 주워 모은 돈이 허공으로 사라질 뻔했다는 안도감과, 가짜 아들에게 속아 넘어간 자신의 처지에 대한 허탈감이 교차하며 굵은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신협 안으로 뛰어 들어온 진우가 황 노인을 부축하며 상황을 살폈다.

“장 사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보이스피싱입니까?”
진우가 숨을 헐떡이며 기철을 올려다보았다. 기철은 평소의 넉살 좋은 동네 아저씨 표정으로 돌아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 박 순경님. 다행히 돈은 안 부친 모양입니다. 황 어르신이 아들내미 근황을 깜빡하신 모양이네요. 요즘 저런 놈들 수법이 하도 교묘해서 원.”

진우는 황 노인을 다독이며 서둘러 지구대로 인계하려 했다. 기철은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단순 보이스피싱 사건. 경찰의 매뉴얼대로라면 수사는 여기서 끝이었다. 대포폰의 발신지는 해외일 확률이 높았고, 점조직의 말단 놈들을 잡아봐야 꼬리 자르기에 불과했다.


그날 오후, 시장 골목은 묘하게 어수선했다.

‘원조 소머리국밥’의 옥분이 국자를 팽개치고 헐레벌떡 인쇄소 문을 열어젖혔다.

“장 사장! 큰일 났다! 최 영감탱이가... 최 영감탱이가 약을 묵었다 안 카나!”

기철은 인쇄기 위에서 잉크 롤러를 닦고 있었다. 손놀림이 순간 멈췄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 어르신이요?”

“어! 아까 그 ‘청춘 만세’인지 뭔지 하는 지하 홍보관에서, 관절에 좋다카는 가짜 녹용을 이천만 원이나 주고 샀다 안 카나! 평생 고친 라디오 삯 다 털어서 샀는데, 박스 까보니까 안에 싸구려 한약재 찌꺼기만 잔뜩 들어있었다 카드라. 억울해 미치겠다고, 농약을 묵고... 묵고... 아이고, 참말로!”

옥분이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기철은 쥐고 있던 헝겊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끝에 묻은 검은 잉크가 마치 응고된 피처럼 보였다.


꼬장꼬장하고 자존심 강하던 최말동.

평생 낡은 전파사 구석에서 기계들과 씨름하며 외롭게 살아온 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휴지 몇 롤과 계란 한 판의 알량한 호의에 속아 전 재산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어디로 실려 갔습니까?”

기철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차가웠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옥분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평소 보지 못했던 서늘한 살기가 기철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성모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경찰도 뜨고 난리다.”

기철은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헐렁한 낚시 조끼 아래 숨겨져 있던 다부진 어깨와 등 근육이 섬뜩한 선을 그려냈다.

그는 인쇄소 구석,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먼지 쌓인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
블랙 요원 시절의 흔적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검은색 전술 장갑과 두꺼운 금속 질감의 삼단봉을 조끼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시스템이 보호하지 못하는 외로운 노인들의 피눈물.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점조직 사기단.

사냥개가 피 냄새를 맡았다.
평화로운 은퇴 생활은 오늘부로 끝이었다.

기철은 인쇄소 셔터를 쾅 소리 나게 내리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무지개 시장의 골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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