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어느 은퇴자의 은밀한 취미생활
성모병원 응급실 복도는 차갑고 무거웠다.
기철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위 세척을 마치고 링거를 꽂은 최말동 노인을 응시했다. 창백한 얼굴 위로 깊게 파인 주름이 평소보다 훨씬 야위어 보였다. 다행히 독한 약을 조금 마신 직후 옥분 할머니가 발견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이고, 어르신. 어쩌자고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셨어요!”
신입 순경 박진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응급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수첩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치며 기철에게 다가왔다.
“장 사장님, 오셨습니까? 저 망할 ‘청춘 만세’ 놈들, 저희가 지구대에서 출동해보니 이미 셔터 내리고 잠적해 버렸습니다. 안에 있던 싸구려 한약 상자 몇 개 빼고는 서류고 뭐고 싹 다 치웠더라고요.”
“합법적인 방문판매업체로 등록해 놨겠죠.”
기철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분통을 터뜨렸다.
“맞습니다! 서류상으로는 할아버지들이 자발적으로 구매한 정상적인 거래예요! 강매당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사기죄 성립이 까다롭습니다. 게다가 대포통장이라 돈줄 추적도 시간 엄청 걸리고... 환장하겠습니다, 진짜!”
경찰의 한계. 철저한 매뉴얼과 절차에 묶인 공권력은 점조직처럼 치고 빠지는 ‘떴다방’ 사기단 앞에서 번번이 무력했다.
기철은 창문 너머 최 노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평생 기계를 만지며 외롭게 살아온 꼬장꼬장한 노인의 자존심이, 달콤한 거짓말과 휴지 몇 롤에 무참히 짓밟혔다.
“박 순경님, 수고하셨습니다. 어르신은 제가 모시고 갈 테니 복귀하시죠.”
“네? 하지만...”
“지구대도 바쁘실 텐데, 노인네 푸념 듣는 건 제가 전문 아닙니까. 어차피 경찰 수사로 해결 안 되는 거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기철의 눈빛이 평소의 서글서글함을 지운 채 서늘하게 빛났다. 진우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 10시. 무지개 시장.
셔터가 내려진 낡은 ‘형제 전파사’.
최 노인은 퇴원하자마자 링거 맞은 팔을 부여잡고 좁은 전파사 안쪽 골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천만 원. 라디오와 선풍기를 고치며 평생 쥐어짜듯 모은 전 재산이었다.
끼익-
전파사 뒷문이 조용히 열리며 기철이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막걸리 두 병과 옥분 할머니가 싸준 두부김치가 들려 있었다.
“어르신, 한잔 하십시다.”
기철이 상을 펴고 막걸리를 따르자, 최 노인이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간판장이 놈아, 내 꼴이 우스워 죽겠제? 다 늙어서 사기나 당하고, 죽지도 몬하고!”
“우스우면 막걸리를 사 왔겠습니까. 어르신 화병 나서 쓰러지면 라디오 고칠 사람 없어집니다.”
기철이 막걸리 잔을 내밀었다. 최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그 새끼들... 내 돈... 이천만 원...”
최 노인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 돈, 찾고 싶으십니까?”
기철의 차분하고 나직한 질문에 최 노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철은 헐렁한 낚시 조끼 안주머니에서 낡은 폴더폰 하나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 낮에, 보이스피싱 놈들이 황 어르신한테 전화 걸었던 폰입니다.”
“이게... 이게 뭐 우짜라고?”
“황 어르신 건과 홍보관 떴다방. 우연히 같은 날 일어난 별개의 사건 같지만, 저놈들 뿌리는 같습니다. 노인들의 명단을 공유하고, 돈을 빼먹는 루트가 조직적으로 얽혀 있죠.”
기철은 국정원 블랙 요원 시절, 중동의 테러 자금줄을 추적하던 방식을 떠올렸다. 점조직의 말단을 치려면, 놈들이 사용하는 통신망의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 대포폰으로 발신된 마지막 신호를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놈들의 중계기나 콜센터 위치 말입니다.”
기철의 말에 최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도 몬하는 걸 니가 우째 하노? 그리고 내는 스마트폰 어플도 깔 줄 모른다 카이!”
“스마트폰은 필요 없습니다.”
기철이 전파사 벽면을 가득 채운 낡은 무전기와 주파수 측정기, 납땜 인두들을 가리켰다.
“어르신, 옛날 군에 계실 때 대북 감청 부대에서 암호 해독하셨다면서요? 첨단 디지털 암호도 결국 아날로그 주파수 대역을 거쳐야 합니다. 이 폰의 특정 주파수 핑(Ping)을 강제로 증폭시켜서, 놈들이 쓰는 기지국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겁니다.”
최 노인의 흐리멍덩했던 눈빛에 순간 미세한 불꽃이 튀었다.
평생을 기계와 씨름하며 납땜 냄새를 맡고 살아온 아날로그 기술자. 디지털 시대에 밀려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옛 기술이, 범죄 조직을 잡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노인의 핏줄이 뛰기 시작했다.
“간판장이... 니 정체가 뭐꼬?”
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동네 이웃을 돕는 평범한 간판장이입니다.”
기철이 씩 웃었다.
“주파수 증폭기만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놈들의 콜센터만 찾으면, 어르신 돈은 제가 반드시 찾아 오겠습니다.”
최 노인은 막걸리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전파사 구석에 처박혀 있던 먼지 쌓인 오실로스코프와 납땜 인두를 꺼내 들었다.
“시끄럽다. 인두나 달궈라.”
낡은 전파사 구석에서, 아날로그 기술자의 거친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