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지] 그 좋은 지식을 왜 '읽고' 계신가요?

허공만 보고 말하는 요즘 교양 예능

by 공감디렉터J

어느 순간부터 TV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특정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거나, 역사의 비화를 들려주는 전문가들의 지식 토크쇼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어딘가 모를 불편함이 감돌기 때문입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바로 화면 속 출연자들의 ‘시선’입니다.

서로 눈을 맞추고 생생한 대화를 주고받는 대신, 대부분의 출연자가 카메라 옆 허공의 한 지점을 응시하며 약속된 대사를 읊조립니다. 베테랑 전문가들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날것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싶지만, 부자연스러운 시선과 기계적인 말의 흐름이 몰입을 방해하는 순간, 시청자는 이야기 밖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프롬프터는 언제부터 필수품이 되었나

방송에서 프롬프터(Prompter)가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뉴스 보도였습니다.

앵커가 정확하고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뉴스에서는 프롬프터가 필수적인 장비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시청자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부분입니다.


이후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대명사인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롬프터 활용의 좋은 예시를 보여주었습니다. 진행자 김상중 배우는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 특유의 중저음과 연기력을 더해 대본을 '살아있는 언어'로 재창조합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 렌즈, 즉 시청자를 향해 있고, 그의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사건에 대한 진중한 태도와 분노, 안타까움을 담아내며 프로그램의 몰입감을 극대화합니다.

이는 '보고 읽는' 행위가 진행자의 역량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 프로그램입니다. 초기 진행자였던 설민석 강사는 뛰어난 쇼맨십과 흡입력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에는 프롬프터의 존재를 시청자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할 만큼, 그의 강연은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관계 오류 논란이 불거지면서 설민석 강사가 하차했고, 프로그램은 정확성을 담보하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 교수들이 돌아가며 강연하는 방식으로 포맷을 변경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정확성'이라는 명분 아래 프롬프터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방대한 정보를 오류 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방송 연기에 익숙지 않은 전문가들을 위한 배려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맞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일부 회차에서는 전문가와 패널들이 각자 다른 곳의 프롬프터를 보며 정해진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듯한 어색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지식 전달’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을지언정, ‘소통과 공감’이라는 방송의 또 다른 미덕을 잃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잘 짜인 각본의 편리함, 그 이면의 아쉬움

제작진의 입장에서 프롬프터의 활용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첫째, 정보의 정확성을 높이고 방송 사고의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특히 역사, 과학, 법률 등 민감하고 복잡한 정보를 다룰 때, 검증된 원고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둘째, 제작 효율성을 높입니다. 출연자들의 즉흥적인 대화로 녹화가 길어지거나 이야기의 흐름이 산만해지는 것을 막고, 정해진 분량 안에 기승전결이 뚜렷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용이합니다. 이는 후반 편집 작업의 수고를 덜어주는 효과적인 통제 장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작상의 편리함이 시청자의 즐거움과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전문가의 머릿속에 가득한 지식과 연륜이 필터 없이 터져 나올 때의 희열, 패널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전문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더 깊은 이야기를 풀어낼 때의 감동, 출연자들 간의 지적인 교감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잘 만든 오디오북을 출연자들이 역할만 나눠 읽어주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날것의 지식'이지 '잘 쓴 낭독회'가 아니다

카메라 앞에 서서 대중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전문가는 그 내용에 대한 완벽한 숙지는 물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태도와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물론 모든 전문가가 방송인이 될 수는 없기에 프롬프터가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프롬프터가 주인공이 되고 전문가는 '낭독자'로 전락하는 것은 시청자와 출연자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이는 전문가의 권위와 자율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식을 값싸게 보이게 만들 위험마저 있습니다.


제작진 역시 리스크를 줄이는 데만 골몰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전문가의 지식이 가장 빛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때로는 통제되지 않은 즉흥적인 대화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깃거리가 터져 나오고, 시청자는 바로 그 '날것'의 순간에 더 깊이 몰입하게 됩니다.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이라면, 편집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는 만큼 조금 더 자유로운 소통의 장을 열어주는 모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잘 통제된 예측은 안정성을 보장하지만, 때로는 과감한 자율성이 새로운 차원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합니다. 프롬프터 너머의 진짜 지식, 대본 너머의 진심 어린 소통이 그립습니다.


Edge는 '가장자리', '날카로움' 등의 의미로 일상 속 평범함에서 참신하고 색다른 생각이나 시각을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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