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러브레터 : 그때 우리들의 플레이 리스트(‘80)
1985년, 낡은 LP판이 먼지를 일으키며 돌아가는 음악다방 안, 지혜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갓 스무 살, 그녀의 세상은 온통 민준이었다. 통기타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그는, 그녀의 밋밋했던 일상에 나타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어느 늦은 밤, 골목길 어귀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민준의 모습은 지혜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는 수줍어하면서도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혜야, 널 만나기 전엔 그냥 하루하루 살아내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널 알고부터 길가에 핀 꽃이 보이고, 하늘이 이렇게 파란 줄도 알게 됐어. 넌 그렇게, 나를 다시 웃게 만들어.”
그의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고백에 지혜의 세상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 행복 위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민준의 손에 들린 입영통지서 한 장 때문이었다.
“나...괜찮을까? 너 없이 혼자서...”
지혜의 떨리는 목소리에 민준은 애써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잖아. 운명이 잠시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
훈련소에서 날아온 민준의 편지에는 꾹꾹 눌러쓴 그리움이 가득했다.
“지혜에게. 이곳에서의 시간은 바깥보다 훨씬 더디게 흘러. 매일 밤 눈을 감으면 네 얼굴이 떠올라.
혹시라도 네 기억 속에서 내 모습이 희미해질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워.
10월의 마지막 밤, 모두가 지나간 세월을 노래할 때도, 나는 너와의 시간만을 기억할 거야.”
하지만 세월은 지혜의 기다림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첫 휴가를 나온 민준이 마주한 것은 다른 남자와 나란히 서 있는 지혜의 모습이었다.
민준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지혜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었어, 민준아.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 부디 나 같은 건 잊고 잘 살아….”
민준은 돌아선 지혜의 뒷모습을 보며 주저앉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마음처럼.
80년대의 지독했던 순애보는 그렇게 한 청춘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애증의 상처를 남기고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