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영원할 것 같던 기다림의 멜로디

다시 쓰는 러브레터 : 그때 우리들의 플레이 리스트(‘80)

by 공감디렉터J

1985년, 낡은 LP판이 먼지를 일으키며 돌아가는 음악다방 안, 지혜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갓 스무 살, 그녀의 세상은 온통 민준이었다. 통기타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그는, 그녀의 밋밋했던 일상에 나타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어느 늦은 밤, 골목길 어귀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민준의 모습은 지혜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는 수줍어하면서도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혜야, 널 만나기 전엔 그냥 하루하루 살아내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널 알고부터 길가에 핀 꽃이 보이고, 하늘이 이렇게 파란 줄도 알게 됐어. 넌 그렇게, 나를 다시 웃게 만들어.”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행복을 주는 사람, 해바라기, 1983>


그의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고백에 지혜의 세상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 행복 위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민준의 손에 들린 입영통지서 한 장 때문이었다.

“나...괜찮을까? 너 없이 혼자서...”

지혜의 떨리는 목소리에 민준은 애써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잖아. 운명이 잠시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슬픈인연, 나미, 1985>


훈련소에서 날아온 민준의 편지에는 꾹꾹 눌러쓴 그리움이 가득했다.

“지혜에게. 이곳에서의 시간은 바깥보다 훨씬 더디게 흘러. 매일 밤 눈을 감으면 네 얼굴이 떠올라.

혹시라도 네 기억 속에서 내 모습이 희미해질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워.

10월의 마지막 밤, 모두가 지나간 세월을 노래할 때도, 나는 너와의 시간만을 기억할 거야.”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잊혀진 계절, 이용, 1982>


하지만 세월은 지혜의 기다림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첫 휴가를 나온 민준이 마주한 것은 다른 남자와 나란히 서 있는 지혜의 모습이었다.

민준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사랑이 떠나간다네 이 밤이 다 지나가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은 붙잡을 수는 없겠지

사랑이 울고 간다네 이별을 앞에 두고서

다시는 볼 수 없음에 가슴은 찢어지는데

<사랑이 저만치 가네, 김종찬, 1987>


지혜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었어, 민준아.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 부디 나 같은 건 잊고 잘 살아….”

민준은 돌아선 지혜의 뒷모습을 보며 주저앉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마음처럼.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창밖의 여자, 조용필, 1980>


80년대의 지독했던 순애보는 그렇게 한 청춘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애증의 상처를 남기고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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