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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모 Mar 25. 2019

영화 <가버나움> 리뷰

당신은 어떤 어른입니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럽 어딘가를 여행을 하다 저녁시간이 될 무렵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불이 환하게 켜져 안이 훤히 보이는 어떤  집에 요리를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 어디든 다 사람 사는 건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을 위해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 세상 어디에 가도 볼 수 있구나,,


그런데, 영화 <가버나움>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인 12살 남짓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마르고 체구가 작아 갓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정말 작은 아이다. 그 작은 소년은 가스통을 배달하고, 길거리에서 주스를 팔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한다.


항상 옆에서 같이 자던 여동생의 침대 위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여동생이 생리를 시작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곤 동생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며, 자신의 윗옷을 벗어 생리대처럼 사용하라고 한다. 버리는 것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못하게 여동생을 교육시킨다. 이를 알면 호시탐탐 동생을 노리는 집주인 아들에게 동생을 보낼 거라는 것을 소년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 걱정하던 그날이 왔다. 동생은 어울리지도 않게 화장을 하고 있고 어른들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동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동생의 나이는 불과 열한 살이다. 동생을 데리고 도망치기 위해 준비했던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고, 울부짖는 동생의 뒤를 따라가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뒤로 자인은 집을 나와 버스를 탄다. 옆자리에  할아버지를 따라 우연히 놀이동산 앞에서 내린다.

놀이동산은 아이들에게 보통은 가장 신나고 즐거운 공간이다. 그러나 이 소년에게 이 공간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소년의 눈망울엔 내내 눈물이 고여있다. 아이의 표정과 상반되는 공간이 주는 이 아이러니함이 더욱 뭉클하다.

아이는 지옥 같은 집에서 나왔지만  더 한 지옥이 기다린다. 먹을 것이 없고, 일할 곳을 찾아 헤매지만 어린 소년을 받아주는 곳은 없다.

놀이동산에서 일하고 있는 라힐은 불법체류자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화장실  칸을 몰래 사용해 플라스틱  안에 아이를 두고 아무도 없는 틈을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그런 라힐에게 지안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자인은 라힐의 집에서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도우며 함께 지내게 된다. 라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강한 모성애를 보인다. 자인은 그녀의 모성애를 보며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자인은 그녀의 아이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보살핀다. 칭얼대는 아이를 위해 창문 바깥으로 거울을 비춰 옆집에서  TV 보여주기도 한다.

놀이동산에서 누군가 먹다 남은 케이크를   아이의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던  누구보다 모성애 강한 그녀가 어느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자인은 그녀를 찾아 그녀가 갈만한  이곳저곳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다. 돈이 부족해 위조 신분증을 만들지 못한 그녀는 결국 불법체류로 잡혀간다. 자인 그녀를 찾을 길은 어디에도 없다.

자인 그녀가  돌아올 거라 믿고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거리로 나간다. 스케이트보드를 훔쳐  위에 아이를 앉혀 끌고 다니며   있는 것들을  하지만 결국 현실은 불법 중개인에게 아이를 건네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을 스웨덴으로 보내준다고 믿고 필요하다는 출생신고 서류를 찾으러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자신의 출생신고 조차 하지 않은 부모를 맞닥드린다.  끔찍한 현실은 집주인 아들에게 팔려간 동생의 사망 소식이었다. 11 어린 소녀에게 가해진 끔찍한 일들을 미뤄 짐작할  있다.  결국 자인 동생을 그렇게 만든 집주인 아들을 칼로 찌르고 지금 여기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나를 낳아준 부모를 고소한다  외친다. 하나를 걷어가시면 하나를 다시 주신다며 동생을 잃고 아기를 가졌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이상 아이를 낳을  없게  달라라고 말한다.

이 아이에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증오만이 남아 세상을 향해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한다고 외칠 만큼 잔인하고 힘겨운 일이다. 지키고 싶었던 동생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는 현실은 절망으로 가득 채워지고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분개할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준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국가적 제도적 차원의 문제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는 자인 부모와 라힐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며  문제를 다시 개개인의 어른의 문제로 가져와 우리에게 당신은 어떤 어른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자인 영화 내내   번의 미소도 보여주지 않다 마지막 장면 신분증에 들어갈 사진을 찍을  미소를 보인다.

미소는 아이의 얼굴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는 온전히 어른의 책임이라고 못을 박는 엔딩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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