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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Feb 06. 2022

라디오천국

Feb 5, 2022

요 며칠 잠을 잘 못 잤다. 어수선한 꿈을 연달아 꿨다. 꿈에서 깨면 새벽 두 시쯤이었다. 한번 달아난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피로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모처럼 낮잠을 푹 잤다. 그랬더니 이번엔 밤잠이 오질 않는다. 억지 잠을 청하기도 뭐해서 다시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았다. 생각해 보니 이 시간에 혼자서 깨어있는 건 오랜만이다. 평소 열 시면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타공인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내게도 자정에 시작하는 심야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듣던 시절이 있었다.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당시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기숙사생들에게 새벽 한 시까지 의무적으로 자습을 시켰다. 잠 많은 성장기 청소년에게 야간 자율학습 시간은 늘 더디게만 느껴졌다. 라디오 청취는 졸음을 견뎌보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다. 당시에는 SBS 파워 FM에서 송출되던 <하하의 텐텐클럽>과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 같은 방송을 즐겨 들었다. 재밌는 사연이 소개될 때마다 독서실 책상 칸막이에 얼굴을 묻고 킥킥거리던 기억, 문자메시지로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하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가 청한 곡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생이 되면서 야간 자율학습의 늪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라디오에 대한 애정은 꾸준히 이어졌다. 대개는 음주로 점철되어 있었던 철부지 새내기 생활을 만끽하면서도 틈틈이 라디오를 들으려고 했다. 지속하는 힘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일도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오래 이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좋아하는 마음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 그 무렵의 나는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순수하게 좋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사연에 공감하고, 몰랐던 좋은 음악을 알게 되는 그 시간들이.

 

원맨 밴드인 토이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고교 시절,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을 우연히 듣게 됐다. 그 곡이 좋아서 토이의 다른 곡들도 찾아들었다. 들을수록 좋은 음악이 많았다. 어떤 예술 작품은 만든 사람을 짐작케 한다. 토이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음악을 만든 사람이라면 다정한 성정의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라디오 방송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무 살 봄의 일이었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잎을 떨구고 낯설기만 하던 대학 생활에 점차 익숙해져  무렵,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의 첫 방송이 전파를 탔다. 라디오천국은 이전까지 들어오던 라디오 방송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방송에서 쉽게 들을  없는 비주류의 음악들을 선곡했고, 심야 라디오치고는 지나치게 웃겼고, 그러면서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듣고 있다 보면 유쾌하면서도 사려 깊은, 그래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친구가  앞에서 재잘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기가 좋아서 매일 자정이 되면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20대의 나는 라디오천국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 여러 고민들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에, 휴학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안에, 유학 가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때에도 하루의 끝에는 언제나 라디오천국이 있었다. 라디오천국이 종영된 이후로는 이전처럼 라디오를 꾸준히 들을 수 없게 됐다.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면서 심야 라디오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된 까닭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라디오천국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서 그 자리를 다른 방송으로 채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는 것 같다.


한때 가장 절친한 친구였고, 동시에 나의 20  자체이기도 했던 라디오천국. 오늘 같이   드는 밤이면 유난히 라디오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짙어진다.  시절 라디오천국의 엔딩 멘트로 추억 여행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행복하세요.



문장과 음악들.

FM 라디오가 주는 매력을 알게 된 그때가 바로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내가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면서 쉽게 쉽게 내뱉는 말과 때론 실없다고 느낄 때마다 조금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어릴 적에 받았던 라디오의 감동이 떠오를 때다.

'모두가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살면서 때론 잔잔한 기쁨을 만날 수 있어서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내 방송을 듣는 이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의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만큼이 더 흘러서 누군가도 나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 당신의 라디오 방송이 참 고마웠다고.

- 유희열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라디오 천국' 중에서


유희열, <라디오천국>


Mondo Grosso, <1974 - Way Home ->


Ryuichi Sakamoto, K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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