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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Oct 04. 2021

하코다테 과내여행 (2) :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

Jan 14, 2017

일정표에 따르면 목적지인 하코다테에는 오후 1시 2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마가리에서 모리오카까지 아키타 신칸센 고마치 12호를 타고 이동한 후, 도호쿠-홋카이도 신칸센 하야부사 5호로 환승해 신하코다테호쿠토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도중에는 쓰가루 해협을 관통하는 세이칸 터널도 지나게 돼 있었다. 1988년 개통한 세이칸 터널은 지난해(2016) 스위스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이 개통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세계 최장(最長)'이라는 수식어를 지켜왔다.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든 다시 쓰이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기록은 유의미하기도 하고 무의미하기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손에 든 여행 안내서를 차근히 읽어 내려갔다.


여행 안내서는 간사인 N이 이번 여행을 위해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다. 안내서에는 주도면밀한 N의 평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일정표와 방문 장소에 대한 설명, 긴급연락처뿐만 아니라, 여행 전 체크리스트나 신칸센 왕복편의 좌석 배정표까지 넣어둔 점이 그랬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모든 결과물은 맑은 하늘 아래의 물낯을 닮아서, 만든 사람의 많은 부분을 반영한다. 어떻게 보아도 N이 만든 게 분명한 여행 안내서를 펼쳐 들고서,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일 때 그에게 가장 가까이 가닿을 수 있는 방법은 그가 만들어낸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코다테까지 가는 길은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분위기 메이커인 F를 필두로, 맥주를 한잔씩 걸친 후 기분이 좋아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금세 잊힐 얘기들이었고, 실제로 여행이 끝난 후 사람들 사이를 오갔던 말들은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기억의 저편으로 휘발됐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여행지로 향하고 있다는 설렘의 테두리 안에서 맘껏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모습만큼은 선명한 형태로 남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남겨진 장면이 불쑥 떠오르는 날이 있을 거라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낡은 책 속에서 언제 꽂아뒀는지 모를 책갈피를 우연히 발견하듯이, 그런 식으로 느닷없이.


열차가 곧 세이칸 터널로 진입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 건, 혼슈 최북단에 위치한 오쿠쓰가루 이마베쓰(奥津軽いまべつ) 역을 통과한 직후였다. 오쿠쓰가루 이마베쓰 역은 혼슈에 있는 기차역 중 유일하게 JR 홋카이도가 단독으로 관할하는 역이기도 하다. 이 역의 이름에 사용된 '이마베쓰(いまべつ)'라는 지명은 '타는 강(焼く川)'을 뜻하는 아이누어 '이마 펫'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이 땅에 먼저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은 어쩌면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일본에서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열차가 굉음을 내며 터널에 들어섰다.


열차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거침없이 질주해 나갔다. 터널의 불빛들은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며 열차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점이 되면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열차가 바다 아래를 지나고 있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나도 모른다는 것, 바로 그 점이 나를 두렵게 했다.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불안을 견디는 동안, 열차는 용기 있게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머물던 자리에 빛이 파고들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또 다른 설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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