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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Sep 23. 2021

하코다테 과내여행 (1) : 동행의 시작

Jan 14, 2017

"그런데 도대체 왜 한겨울에 설국에서 설국으로 여행을 가는 거야?"


F의 말 한마디에 조용했던 사무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일본에서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을 가리켜 '설국(雪国)'이라는 표현을 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동명 소설의 배경이 된 니가타도 설국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F의 발언은 이번 과내여행을 설국 중에서도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홋카이도로 가게 된 데에 대한 불만을 귀엽게 토로한 것이었다. 과내여행(課内旅行)이란 같은 과 직원끼리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우리 과는 간사를 맡고 있는 N의 주도로 지난해부터 매월 여행 경비를 조금씩 모아 왔다.


여행을 이제서야 가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우리 부서는 국내외 교류와 문화관광 업무를 담당하고 있고, 그렇다 보니 여행하기 좋은 계절에는 주말마다 행사를 치르느라 바빴다. 과내여행의 최종 행선지 후보로는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가 올랐는데, 투표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이 하코다테를 택했다. 그렇게 해서 한겨울 설국에서 설국으로의 여행이 결정됐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아키타에는 큰 눈이 연거푸 내렸다. 그러니 눈을 뚫고 또 눈을 보러 가야겠느냐는 F의 투정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여행일 아침, 오마가리 역 개찰구 앞에서 약속한 시간에 사람들을 만났다. 이번 여행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열한 명이었다. 여행 단장은 우리 중 가장 연장자인 F가 맡았다. 정년 퇴임을 2년 앞두고 있는 F는 원래 보육원 선생님이었다. 다이센시는 원아 부족 문제로 몇 해 전 시립 보육원을 통폐합했는데, 그때 선생님의 일자리도 줄게 되면서 기존에 일하던 선생님들에게 시청 공무원으로 전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대부분 보육원에 남는 쪽을 택했지만, 그는 공무원이 되는 쪽을 택했다.


주변에서는 적지도 않은 나이에 수십 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뜬금없이 공무원이 되겠다는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궁금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대체 공무원들이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는지. 전직의 이유가 너무도 그다워서, 이야기를 듣고서는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애당초부터 승진이나 권력에는 뜻이 없는 듯했고, 그래서 그런지 상대의 지위나 직책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자기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주변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았다.  특유의 노련함과 유쾌함은 언제 어디서든 빛을 발했다. 나는 그런 그를  때마다 저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설국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 아침에 높은 확률로 기분이 저조하다. 밤새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면서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과내여행을 떠나던 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F는 어느 상황에서든 예외다. 그는 한껏 가라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실없는 농을 치며 웃음을 안기고 다녔다. 부단장을 맡은 I는 그런 F를 바라보며 이른 아침부터 믿을 수 없는 텐션이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삶이 축적될수록 여행의 향방을 결정하는 건 화려한 행선지가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뚜렷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F와 함께하는 이번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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