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21, 2016
12월이 되면서 아키타에는 눈 내리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짧아진 낮의 공백만큼 밤은 더 길어졌다. 태양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인지 사람들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고 차분해졌다. 겨울색이 짙어질수록 주변의 풍경은 가라앉는 분위기다. 침잠하는 내면에도 모습이 있다면 꼭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심한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에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저마다의 속도로 점멸하는 크리스마스 장식의 불빛만이 이 얼어붙은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으니까.
연말연시 휴일을 이용해 한국에 가기로 결심한 건 두 달 전쯤 일이다. 언니가 결혼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더라면 올해는 이곳에 남아있는 편을 택했을지 몰랐다. 여러 사정이 있어 택한 한국행이었지만 겨울이 깊어갈수록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적한 풍경 속에서 홀로 연말연시를 보낸다면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다 지칠 게 분명했다. 일본 관공서의 휴일은 12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3일까지이지만, 나는 휴일 전후로 연차를 더 붙여 2주 가까이 쉬기로 했다. 외국인이어서 가능한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떠나는 내게 퇴근 후 갑작스러운 회식을 제안해온 건 I였다. 불과 며칠 전에 송년회를 한 터라, 나는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일본에 온 뒤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니 '하바기하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냥 회식할 구실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나를 생각해서 한다는 데 한사코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마지못해 알겠다고 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과 직원들에게 '하바기하기'에 동참할 사람이 없는지 묻고 다녔다. 뜻밖에 대다수 인원이 참여하겠다고 했다.
퇴근 후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내 덕에 올해는 송년회를 두 번 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다음은 '하바기누기'를 하자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내가 '하바기하기'와 '하바기누기'의 뜻에 대해 묻자, 관광반의 O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하바키(脛巾)는 옛사람들이 방한과 다리 보호를 목적으로 이용했던 각반(脚絆)을 가리키는 말로, 무릎 아래부터 발목을 감싸는 의복의 한 종류를 말한다.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내륙과 산간지방에서는 한겨울 여로에 오를 때 이 하바키의 착용이 필수적이었다.
'하바키를 신다(脛巾をはく)'에서 유래한 '하바기하기(はばぎはぎ)'는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격려하는 모임을 뜻하는 말이다. 반대로 '하바기누기(はばぎぬぎ)'는 '하바키를 벗다(脛巾をぬぐ)'에서 비롯된 말로, 긴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온 사람을 위로하는 모임을 뜻한다. 교통과 제설의 기능이 지금 같지 않았던 옛날에도 겨울이면 이 지역에는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다. 혹한의 설로에서는 불빛이나 온기 따위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겨울 여행이란 어쩌면 남아 있는 삶을 담보로 해야 하는 비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하바기하기'와 '하바기누기'라는 풍습은 소중한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겠구나, O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 짐작했다.
회식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사람들과의 추억이 쌓여가는 동안 바깥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갔다. 회식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 모두에게 고마움과 이른 연말 인사를 전했다. 취기가 올라 모처럼 한껏 밝아진 사람들은 내게 한국에 조심히 다녀오라고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 상점가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이고 있었고, 내 앞에는 새롭게 쌓여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이 놓여 있었다. 순백의 눈 위로 한 발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오래전 '하바기하기'를 했던 여행자들은 불빛보다 따뜻한 마음들이 곁에 있어 그 여로가 두렵지 않았겠다고.
부기.
제목은 아키타와 니가타를 배경으로 하는 윤대녕 작가의 동명 소설 <눈의 여행자>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