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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Sep 12. 2021

월동준비

Nov 9, 2016

가을의 자락에 접어들면서부터 아키타의 도로변에는 정체를   없는 기다란 봉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빨간색과 하얀색이 섞인 일자형 봉으로, 높이는 이삼 미터쯤 되는  같다. S에게 물으니 '스노 '이란다. 한겨울 눈이 많이 내리면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데, 이를 구분하는 것이 스노 폴이라고 했다. 스노 폴은 제설차들이 눈을 치워야  곳을 가리키는 지표이기도 하다. 도로마다 빠짐없이 세워진 스노 폴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게, S 오직 설국에서만   있는 특별한 광경이지 않겠느냐며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변화가 생긴 것은 도로만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동네 마트에서는 등유를 담아 보관하는 폴리 탱크와 제설용 삽들이 진열되기 시작했다.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호설지대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물품들이다. 아키타를 비롯한 동북지방은 주로 등유 난로를 이용해 난방을 한다.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 목조주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 나는 진작에 등유 난로를 개시했다. 우리 집 현관에는 20L짜리 빨간색 등유 폴리 탱크가 모두 3개 놓여있는데, 등유를 가득 채워놓을 때마다 어쩐지 집안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것 같다.


제설용 삽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작고 가벼워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눈삽(雪はね), 자루가 짧고 삽 머리가 큰 스노 스콥, 한 번에 대량의 눈을 치울 수 있는 스노 덤프 등이 대표적인 제설용 삽이다. 여담이지만 일본에는 지역마다 제설을 나타내는 방언이 있다고 한다. '유키카키(雪かき)'라는 표현이 전국적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수분을 많이 머금은 습설이 내리는 아키타에서는 '유키요세(雪寄せ)'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무거운 눈더미를 길섶으로 치워둔다는 뉘앙스가 강한 표현이다.

 

한편, 겨울이 가까워지면 나무들도 '후유가코이(冬囲い)'라는 옷을 껴입는다. '후유가코이'는 눈과 추위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하는 울타리를 가리키는 말로, 보통 대나무나 볏짚, 밧줄 등을 이용해 만든다. 나무가 무거운 눈을 버티지 못해 쓰러지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가 보내야 할 겨울을 생각하는 마음은 아마 선대부터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평소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산을 정복했다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자연은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동행할 대상이어야 한다고 언제나 생각한다.


최근 나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월동준비를 했다. 먼저 수도를 잠가 배관에 남아 있는 물을 빼는 법을 배웠다. 겨울철 동결방지를 위한 것으로 일본어로는 '미즈누키(水抜き)'라고 한다. 일본의 날씨 앱에서는 수도동결지수라는 걸 알려주는데, 이 지수가 높은 날에는 꼭 해야 하는 작업이다. 방한 부츠도 구입했다. 제설을 하더라도 인도의 눈이 무릎께까지 오는 일이 빈번하게 있으니 목이 긴 것을 사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해 샀다.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부탁해 전기장판도 받았다. 전기장판은 일본 것보다 한국 것이 났다. 어쩌면 둘 다 중국에서 만들고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 다이센에는 첫눈이 내렸다. 처음 겪는 길고 긴 겨울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월동준비를 해두었으니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는 그의 시 <서풍의 노래>에서 이렇게 읊었다.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머지 않으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올해의 마지막 월동준비는 이 문장으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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