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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Sep 10. 2021

갓파 쿠와 가을방학을

Oct 26, 2016

도노(遠野) 시로 향하는 길은 한산했다. 버스는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자동차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차선은 일반 국도와 다름없이 2개뿐이어서 어디에나 있는 흔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이센에서 기타카미(北上)로 향하는 동안, 해발 2천 미터에 이르는 큰 산이 겹겹이 이어졌고, 이 때문에 버스는 자주 긴 터널을 지났다. 귀가 먹먹해지거나 머리가 묵직하게 느껴질 때마다, 산을 오르는 것만큼 산을 지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북지방의 풍경은 어디를 가나 서로 닮아 있다. 높은 산이 있고, 너른 들이 있다. 그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풍경이 난 좋았다. 버스를 타든 전철을 타든, 그저 차창 밖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탈 것 위의 시간은 언제나 곧잘 흘렀다. 도노로 가는 동안에도 나는 창밖의 풍경을 간단없이 두 눈에 담았다. 깊은 푸른빛을 띠는 가을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어느덧 다이센에서 세 번째 계절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해가는 계절 속에 착실히 흐르는 시간이 있다.


처음 도노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온 건 O 과장이었다. 관광반에서 그린 투어리즘을 위해 사전 답사를 하러 가는데, 외국인 관광객의 역할로 동행해 의견을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내가 도노라는 지명을 듣고 다소 생경하다는 표정을 짓자, O는 '갓파의 고장'이라는 부연 설명을 했다. 갓파는 일본 민담에 나오는 물의 요괴다. 흡사 까치집 같은 머리 부분에는 물이 고여 있는데, 이 물이 말라버리면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갓파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하라 케이이치 감독의 영화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을 통해서였다. 극 중 주인공 갓파 '쿠'와 코이치가 동료 갓파를 찾기 위해 떠나는 곳이 바로 이와테현의 도노 시다. 도노는 서울보다 면적이 넓지만, 사는 사람은 3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넓은 땅 어딘가에 갓파 같은 요괴가 살 거라고 상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실제 도노의 모습을 보면 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동북 지방의 시골 마을들을 볼 때마다 놀랍고도 부러운 점 하나는, 사람이 사는 주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연의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인위적인 가설물을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풍경을 바라볼 때 눈에 걸리는 장애물이 거의 없다. 도노는 내가 지내는 다이센보다도 더 자연에 가까운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영원한 일본의 고향(永遠の日本のふるさと)'이라는 시 슬로건을 붙인 것도 이해가 갔다. 고층 건물이 빼곡히 늘어선 도심과는 다르게, 오랜 향수를 자극하는 아련한 풍경이 거기 있었으니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도노의 너그러운 품속에서, 이곳으로 도망치듯 떠나오기 전 있었던 거대한 도시를 떠올렸다. 자고 일어나면 달라져있던 빌딩의 높이, 사방에서 그칠 줄 모르고 울려오던 자동차의 경적 소리,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황막하던 신발 굽 소리,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고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던 불빛들, 그리고 그 불빛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무수한 삶들. 언젠가 다시 그 도시의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겠지. 그런 생각에 이르고 나니 내게 주어진 이 시간들을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의 이 평화로운 가을방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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