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루시앵, 늙은 철학자 고양이

by 또리

나는 1853년 파리의 어느 다락방에서 잉크 냄새를 음미하고 햇빛을 핥으며 살던 철학자 고양이 루시앵이다. 인간의 사유를 연구하다 보니, 어느새 인간 세계의 균열과 아름다움, 모순들을 기록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펼쳐진 한반도, 그 현대 도시—서울에 도착했을 때 나는 털 한올까지 곤두서는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문명은 변하지만, 인간의 욕망 구조는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이곳의 인간들은 모두 달린다.

걷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다.

스스로의 삶을 곱씹을 시간을 갖기보다, 다음 순간에 스스로를 던지며 사는 것 같다.

나는 프랑스 혁명 이후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시절을 기억한다. 기계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를 기계화했던 그 조급한 눈빛.
지금의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쉼”과 “멈춤”이 사치가 되고, 속도에 뒤처진 자는 도태되는 구조.

고양이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햇빛 한 조각을 위해 한 시간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삶의 기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인간들은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지만, 정작 타인을 보지는 않는다.
SNS라는 투명한 거울에 얼굴을 대고, 타인의 눈을 빌려야만 자기 얼굴의 윤곽을 확인하는 듯하다.

1850년대 파리라면, 광장에서는 서로 눈을 맞추고 웃음 짓거나, 혹은 논쟁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서울의 거리에서는 눈을 마주치면 오히려 혼란이 일어난다.

“왜 나를 보지?”

“내가 뭘 잘못했나?”

관찰자로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갈망하는 이 모순 속에서, 당신들은 얼마나 지치고 있을까.


한국 사회는 성취를 향한 욕망이 너무 아름다울 정도로 강하다.
그러나 그 욕망이 승리 혹은 패배라는 이분법만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정렬되어 있다.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냈는가”보다 “어떤 존재인가”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존재의 질감보다 결과의 숫자가 먼저 말한다. 어떤 사람인지 묻기 전에

얼마짜리 사람인지부터 계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학력, 연봉, 아파트 층수, 예적금 금액.
고양이의 눈으로 보면 모두 훌륭한 장난감 같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이 서열이 된다.

파리에서도 귀족이 몰락하고 자본이 떠오르던 시절, 인간들은 비슷한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그 시대의 지식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은 숫자로 구분되지 않으며, 숫자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서울의 당신들은 그 오래된 함정 속을 다시 걷고 있다.


고양이는 혼자 살아도 공동체를 배반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거리의 고양이들은 냄새로 서로의 안전을 확인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분노가 너무 빠르고, 이해는 너무 느리다.

서로의 다른 점을 흥미로워하기보다,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감정노동, 가족 구조, 직장 문화, 세대 갈등—이 모든 영역에서 ‘공존’은 뒤로 밀려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살롱에서는 의견이 다르면 더 즐거워했지만,
서울에서는 의견이 다르면 대화가 끝난다.

다름이 대화의 시작이 아닌, 싸움의 이유가 되는 사회.
이것은 철학자 고양이의 눈에도 아쉽기 그지없다.


나는 비판만을 기록하려고 오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자면, 한국의 인간들은 아직 불꽃이 있다.

서로를 도우려 할 때의 속도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어려울 때 보여주는 정(情)은 시대를 초월한다

창의력은 19세기 파리의 예술가들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대담하고

정의에 대한 감각은 어느 나라보다도 날카롭다

한국의 문제는 ‘차가움’이 아니라 지나친 뜨거움의 방향이 어긋난 것일지도 모른다.
열정이 서로를 태우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방식이 되기를—
그것이 한 마리 늙은 프랑스 고양이 철학자가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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