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함

이미 통했을 거라 믿어버린 기준에 대하여

by 베레쉬트

오늘은
너무 서운하다.


왜 이렇게까지 서운한지
잘 모르겠다.


집에 들어와서도
그 감정이 따라왔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았는데도
서운함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 왔어.”


서운함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면
이 감정이 괜히 커질 것 같아서.



“왜 온 거야.”

한참 뒤에야 물었다.

서운함은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냥 담담했다.

“너, 조금 기대했잖아.”

나는 고개를 돌렸다.


기대한 게 아니라
그냥…
알아줄 거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게 기대야.”

서운함이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통했을 거라는 믿음.”




그 말을 듣고
나는 조금 아파졌다.



맞았다.
나는 부탁하지 않았다.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이미 합의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알겠지.

이 상황에서는 그럴 줄 알았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서운함이 내 옆에 앉았다.

“너는 늘 그래.”

“뭘?”

“너는 마음을 먼저 주고,
그걸 말하지 않아.”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말하면 부담 줄까 봐.”

서운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너는 늘
조용히 서운해지지.”

서운함은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실망한 얼굴에 가까웠다.

“나,

너 화내는 줄 알았어.”

내가 말했다.

서운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화는 소리를 내.”


“나는
소리 없이 남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운함이 말했다.


“나는
요구에서 오지 않아.”



“말한 기대에서도 오지 않아.”



“나는
이미 공유됐다고 믿었던 기준이
어긋날 때 와.”



그제야
나는 왜 이렇게 오래 말이 없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너는 왜 항상 이렇게 늦게 와?”

내가 물었다.

서운함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가 끝까지 참고 나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이해하려고 애쓰고,

상대 편을 먼저 들고 나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럼 나는 착한 건가.”

서운함이 나를 봤다.

“아니.”


“너는
네 마음을 마지막에 놓는 사람이야.”



서운함은
상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 대해 말했다.

“너는
기대하면 안 된다고 배웠잖아.”

“기대하면 실망한다고.”

“그래서 기대를 숨기는 법을 배웠잖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근데 기대를 숨긴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야.”

서운함이 말했다.

“기대는
말 안 해도 남아.”

“남아서
이렇게 나로 온 거고.”




나는 서운함에게 물었다.



“그럼 넌 나쁜 감정이야?”

서운함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쁜 감정이 아니야.”

“나는
네 마음이 먼저 갔다는 증거야.”

그 말에
가슴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내가 물었다.


서운함은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말했다.



“나를 없애려고 하지 마.”

“나를 증거로 쓰지도 말고.”



“그럼?”




“나를
말로 옮겨.”


“거리로 옮기지 말고.”







나는 그 말을
조심히 마음에 놓았다.



서운함이 일어났다.

“나, 또 올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근데 다음엔
조금 덜 오래 머물 수 있을 거야.”

서운함이 말했다.



“네가
나를 혼자 삼키지 않으면.”




서운함은 문 앞에서
한 번 더 돌아봤다.



“참고로 하나만 말해줄게.”



“뭐?”





“서운함은
관계가 틀어졌다는 신호가 아니야

관계가
아직 중요하다는 신호야.”








문이 닫혔다.

방 안은 조용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덜 비어 있었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음엔
기대부터 숨기지 말자.”



서운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