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싶어 한다.
모르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야.”
“나는 원래 차가워.”
“나는 감정이 많은 편이야.”
“나는 사람을 잘 못 믿어.”
이 말들은
성격 설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말들은
대부분
감정의 기록에 가깝다.
사람은
반복되는 감정을
견디기 어려울 때
그 감정을
‘나’로 만든다.
그래야
덜 흔들리기 때문이다.
“지금 불안한 것”보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
차라리
안정적이다.
상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건데,
정체성으로 고정하면
흔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감정을
성격으로 굳힌다.
예민함은
대개
많이 다쳤던 감각이고,
차가움은
가까워졌다가
상처받지 않으려는
거리 조절이며,
무덤덤함은
느끼지 않기로 한
오랜 선택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타고난 성격이라기보다
살아오면서
필요했던 반응에 가깝다.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어떤 방식이든
몸이 기억하고 배운다.
그리고
그 방식이
오래 반복되면
그것을
‘나’라고 부르게 된다.
그래서
성격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문제는
이 이름이
너무 단단해질 때 생긴다.
사람은
자기 성격이라고 믿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원래 그래.”
“이게 내 성향이야.”
“어쩔 수 없어.”
이 말들은
자기 이해처럼 보이지만,
종종
자기 관성에 가깝다.
감정은
움직이는 것인데,
성격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변화하고 싶어도
의지보다 빠르게
반사적으로
반복이 선택된다.
성격을 지키는 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아픈 성격이라도,
익숙한 쪽이
덜 무섭다.
그래서 사람은
고통을
버리는 대신
정체성으로 확정된다.
여기서
원인을
알 수가 있다.
성격은
나의 본질이 아니다.
성격은
나의 역사다.
나를 만들었던
환경,
관계,
반응,
선택들이
겹쳐진 결과다.
그래서
성격은
바뀔 수 있다기보다,
풀릴 수 있다.
이해되는 순간
느슨해지고,
보이는 순간
고정이 풀린다.
사람이
성격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자기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정확히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는
사람이
이렇게 굳혀진 성격을
‘나의 운명’이라고
믿게 되는 과정,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이미 정해진 것처럼
살게 되는지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