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는가?
아이 양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가 자주적이고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자주적이고 건강한 성인이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성인은 신체 및 정신적 노동과 같은 생산 활동을 통해 돈을 벌어 최소한 자기 스스로는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타인과 교류하면서 사회적으로도 균형을 이루어 서서히 부모로부터 신체, 정신, 사회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러한 균형은 무너지게 되고 부족한 부분은 결국 타인에게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어 독립된 성인으로 볼 수 없다.
필경사 바틀비는 19세기 미국 낭만주의문학을 대표하는 허먼 멜빌이 1853년 쓴 최초의 단편 소설이다. 주요 줄거리는 변호사 사무실에 필경사로 입사한 바틀비가 자신의 주 업무인 필사를 제외한 상사의 모든 지시를 "안 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로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수동-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자신의 주 업무 조차 하지 않고 마치 가구처럼 사무실에 그저 존재하다가, 가구로서 존재하지도 못하게 되자 결국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후 정말로 죽어버리는 매우 단순한 구성으로 흘러간다. 멜빌의 소설 중 가장 애매하고 여러 해석이 존재하지만, 가장 흔히 바틀비의 저항은 노동을 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가 느끼는 소외감을 보여줌으로써, 영리 목적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비극성을 엄중히 경고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그러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 모두 바틀미만큼이나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잘 해낸다. 지루한 일을 하는 과정안에서 그 일을 즐기고자 나름의 노력을 하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동료들과 서로의 결함을 보완해 주면서 사회적인 역할도 해낸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고용주인 변호사는 오전에만 효율적으로 일 하는 터키에게 오전 근무만 하는 것을 권해보기도 하지만, 터키가 종일 근무를 원하고, 오전에는 효율이 떨어지고 오후에 효율이 좋은 니퍼와 발란스가 맞자 그들을 모두 포용한다. 그가 직원들을 정말 도구로 생각했다면 진작에 터키는 오전 근무, 니퍼는 오후 근무만 시킨 후 인건비를 절감했을 것이다. 변호사는 이와 비슷한 포용을 바틀비에게도 보여준다. 업무 시작 삼일차만에 필사를 제외한 업무와 관련된 지시를 거부하자 필사만 하도록 내버려 두고, 사무실에서 몰래 거주하는 것도, 종국에는 필사 일조차 거부하는 것도 허용한다. 그러나 같은 직군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가구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업무 로딩이 나에게 분산되는 기분이 들어 부당하다 여기게 되니 절반이라도 제대로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의 형평성 문제,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직원을 데리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부정적인 이미지 등은 고용주인 변호사가 바틀비를 향해 느끼는 인간적인 동정만으로 감수하기에 피해가 너무 컸다.
터키나 니퍼도 각자 병리적인 문제가 있긴 했으나, 적어도 고용주가 용납할 수준의 업무 성과를 보여줬고, 지루한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버텼고, 취약해져서 효율성이 저해되었을 때 보완해 주는 동료와 이해해 주는 고용주가 있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바틀비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든 간에 그는 분명 정상 성인에게 기대되는 일상 및 사회생활기능 수준의 경계를 넘어 비정상 수준으로 진입했고, 그에게는 관대한 고용주도, 교도소도 아닌 전문적인 치료적 개입이 필요했다.
바틀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살아가다 보면, 내가 대처 가능한 톱니바퀴같이 느껴지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하기 싫은 것을 하며 보낸다고 생각하며 우울하거나 화를 내면서 일하는 시간을 마치 지옥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른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적어도 나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어야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권리가 생긴다. 일은 곧 노동이므로 성인은 내 몫의 일을 해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노동의 몫으로 받는 성과로 먹고 마시며 짧지만 충분한 유희로 스스로 보상받아야 한다. 그 경험으로 소진된 신체와 정신을 충전하고 또 일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의 끝은 허무와 죽음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