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진단받게 된 사람들은 흔히 “아니 저는 지병도 가족력도 없는데 도대체 내게 왜 이런 병이 생긴 건가요?”라고 묻는다. 왜는 없다. 세상은 부조리하니까 행운도 불행도 불시에 나를 덮칠 수 있다. 매일 술담배를 하는 사람이 무병장수할 수 있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연사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으로 돌진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 덕분에 죽음은 대체로 노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리자 모두들 머리로는 ‘언젠가 나도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죽음을 생각하면 재수 없다’며 죽음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거나 모르는 척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물질적인 것에 몰입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성공한 삶을 살던 혹은 실패한 삶을 살았던, 얼마나 허위의 삶을 살고 있던 혹은 충만한 삶을 살았느냐와 무관하게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같은 종착지를 향해 가게 된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필연적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조차 파괴하지 못할 의미란 것이 과연 내 삶에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소위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품위 있게 살던 이반 일리치는 원인 불명의 불치병에 걸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기의 죽음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신체적 고통보다도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진정으로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더 큰 고통을 받는다.
후회 없이 우아하고 쉽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실존적 질문에 정면으로 부딪쳐야만, 즉 나도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임을 알고 살아가는 삶, 죽음을 직시한 상태에서 설계한 나의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실하고 후회가 적은 진짜 나의 삶을 살 수 있다.
본질적으로 내가 나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나는 삶에서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어떤 가치를 믿고 지지하는지, 살면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어떤 사람들과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은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다가 죽었다면 내 장례식에 초대된 사람들은 허위의 위로가 아닌, 진정한 애도를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나를 상실한 자신의 세상을 삶을 살아내기 위한 위로의 시간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