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처럼 살아도 되지만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모독하지 말라
해외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와 다른 시대에 다른 대륙의 다른 인종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고통은 물리적 시간이나 거리만큼의 간격을 두고 있어서 소설 속 인물의 심리적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조금 덜 위협적으로 다가왔고,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상황이나 감정을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내 나라에서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래서 나도 경험할 수 있었던 내 민족의 고통을 직시하게 하는 한강 작가의 소설, 특히 소년이 온다는 철저히 회피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데 굳이 나의 현재의 일상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는 이야기를 읽고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별다른 고통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를 애청하다가 생의 무자비함을 경험한 이후부터 시청을 회피하게 되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던 것 같다.
지적 허영심이 성장 동력인 나는 언제부턴가 영어가 원서인 책은 원어로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그래서 요즘은 비영어 작가의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던 와중에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한국인이라니! 원서를 언어 장벽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니! 나 빼고 모두가 한강 소설을 읽고 나에게 읽어봤냐고 감상평을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때마침 절기 소설을 맞아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소설인 소년이 온다를 읽게 되었다. 그러나 첫 챕터부터 동호는 ‘너’ 곧 내가 되어 동호의 고통으로부터 거리 두기는 실패하였고 이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을 후회했고, 읽은 직후에도 후회했지만 수일간 곱씹어보며 잘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별하지 않는다는 읽지 못할 것 같다.
한림원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력한 시적 산문“을 선정 이유로 밝혔듯, 상식적이지 않은 폭력과 그 폭력의 피해로 트라우마에 노출된 나약한 인간의 고통을 시적으로 표현하여 후루룩 읽지 못하고 천천히 곱씹어 읽게 되니 오히려 적나라한 사진이나 기사를 읽는 것보다 한층 고통스러웠다.
생물계를 분류할 때 인간도 결국 동물계이므로 살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그러나 바로 내 눈앞에서 나의 친구 혹은 가족이 무고하게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정상적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은 일차적인 생존 본능이기 때문에 이를 선택한 개체는 환경에 적응적인 선택을 한 것이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못 본 척하지 못하는 숭고한 마음, 양심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부조리함을 직시하여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아는 유능함을 갖고, 정의를 위해 그것이 잘못됨을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결과 살해되거나,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심리적 외상을 얻게 됨을 그들이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그것의 숭고함은 훼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희생은 증거로 남아 현재의 나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된 좀 더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폭력을 자행하고 또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생, 자기의 생존만을 중요하게 여긴 동물 수준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조차 하지 않는 불필요한 도륙을,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동족을 빨갱이로 색칠하여 증거를 인멸하고, 살아남은 증거를 왜곡해야 했다. 그 처절한 노력으로 얻은 부를 통해 ‘내가 맞았다’고 자위해야 한다. 물질적 풍요와 사치를 광고하며 같은 동족의 선망과 부러움을 받지 못하면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단지 현재 나의 실존적 문제를 넘어서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약자를 위해 용기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동물계를 넘어선 영적인 존재다. 영혼을 가졌지만 결국 동물이기에 폭력에 깨지고 부서졌을지라도.
목숨은 소중한 것이고 칼에 베이면 아프다. 나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도 못될 것이고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며 산업화 시대의 노동운동가도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동물적인 생존 본능에 근거한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친일파의 부나 독립운동가의 가난을 증거로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나 노동 운동을 하다 죽어간 청년을 두고 세상에 대해서 뭘 모르는 어리석은 학생들의 치기어린 선택이라고 모독하지 않겠다.
나는 과학을 공부하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과 양심을 가졌다고 믿고 나의 생명만큼 타인의 생명도 귀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