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이 소설의 내용은 이전과 같은 것으로 느끼실 수 있으나 다른 내용이고, 의도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파트만 읽으신 분은 파트 1부터 읽으셔야 이 소설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몇 시야?”
이번에는 수정이 먼저 눈을 떴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고,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이상할 만큼 힘이 실려 있었다. 마치 시간을 묻는다기보다, 확인하려는 것처럼.
준혁은 대답하지 않고 탁상시계를 보았다. 숫자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변함없는 시간. 변함없는 날짜. 12월 24일.
“열 시 조금 넘었어.”
말을 하면서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대답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빨리 이해되어서, 반박할 틈조차 없었다.
수정은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도 눈이 내린 뒤였다. 그 풍경마저도 예상 안에 들어 있었다.
“여보야.”
“응?”
“우리… 오늘 뭐 하지?”
준혁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고 했다.
장 보러 가야 했다. 요리를 해야 했다. 파스타를 만들고, 와인을 열고, 영화를 보다 잠들어야 했다. 모든 순서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너무 또렷해서, 오히려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장 보러 가자.”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 역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답이 다른 선택지들 위에서 고른 것이 아니라는 걸.
라디오는 켜졌다. 노란 조명도 켜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순서는 정확했다. 수정은 물을 마셨다. 컵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그 사실을 이상하게 느낄 틈도 없었다.
“여보야.”
“응?”
“만약에 말이야.”
수정은 말을 멈췄다. 어떤 말을 하려 했는지는 그녀 자신도 분명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오늘… 밖에 안 나가면 안 될까?”
준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그 짧은 침묵은 오늘 처음으로 생긴 공백이었다.
밖에 나가지 않는 하루. 그 선택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문장 같았다.
“왜?”
“그냥.”
수정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이전과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확신이 아니라, 시험처럼.
준혁은 창밖을 보았다. 눈은 이미 내려 있었다. 아이들은 곧 눈사람을 만들 것이다. 가게는 붐빌 것이고, 트리는 반짝일 것이다. 저녁엔 봉골레 파스타가 테이블에 놓일 것이다.
그는 그 모든 장면을 이미 본 것처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장은 봐야지.”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수정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실망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그들은 결국 집을 나섰다.
눈은 예상대로 쌓여 있었고, 햇살은 같은 각도로 반사되고 있었다. 눈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수정은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눈사람을 보지도 않았다.
가게도, 재료도, 요리도 모두 어김없이 흘러갔다.
저녁 식탁 위에는 봉골레 파스타가 놓였고, 와인은 잔에 채워졌다. 음악은 재즈였다. 수정은 몇 입을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여보야.”
“응?”
“이게……, 우리가 고른 하루야?”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영화는 틀지 않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오늘 하루 중 가장 낯설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불이 꺼졌다. 커튼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침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김준혁, 제조번호 XLBHFJ1734—”
그 음성은 중간에서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정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상 없음이라고 말하려고 했지?”
침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준혁을 보았다.
“여보야.”
“응.”
“우리, 내일은 뭐 할까?”
준혁은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는 더 이상 준비된 대답이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