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맛을 알다.
디자이너는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혼자 일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고 싶지만 처음부터 혼자서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열심히 할 때 나는 좀 놀았다. 졸업 후가 진짜 생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장 나를 부양할 돈이 필요했다. 회사에 들어갔다.
세상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걸 일을 하면서 느꼈다. 프로젝트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혼자서 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가 익숙한 작업자도 회사는 한 번쯤 경험하면 좋을 것 같다. 잠깐 다녀봤는데 별로던데? 하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든 크든 회사는 회사다. 매일 규칙적으로 일하고 트러블도 겪어보고. 회사에서 배우고 얻어가는 것 몇 가지만 있다면 다닐만하다.
내가 입사한 곳은 작은 디자인 에이전시였다. 구성원은 다해야 열명 남짓이었고 사람은 두세 달 간격으로 바뀌었다. 작은 회사는 한 명 비중이 크다. 사람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옆 사람들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었다.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늘 지진을 대비하며 사는 건 쉽지 않다. 몸에는 항상 힘이 들어가 있었다.
디자인 에이전시는 기업들에서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대행하는 일을 한다. 의뢰인들은 함께 일 한다기보다는 시키고 채근하기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손 바쁘게 만들어 대령했다. 우리는 이 분야 전문가라기보다 그 수족으로 일 했다. 힘들었다. 당연히 워라밸은 보장되지 않았다. 수족 일은 몸은 힘든 것도 있지만 아무 생각 없어지기 쉬웠다. 시키는 대로만 하기가 쉬웠으니까. 아무리 바빠도 스스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성장하기가 힘들었다. 이 일은 미래를 보장해주지도 못했다.
안팎으로 늘 흔들리는 작은 회사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날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심지어 그만두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나는 나와 내 일을 사랑했다. 클라이언트들과 회사 사정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질 수는 없었다.
나는 ‘일’을 배웠다. 보다 정확히는 일에 임하는 ‘태도’를 배웠다. 내가 다닌 회사 상사들은 성격은 지랄 맞을지언정 이 일에 진심인 사람들이었다. 그 사랑의 방식이 다소 거칠어 상처받고 떠난 사람들이 많지만 진심은 언젠가 통한다고. 나에게는 좀 통했다. 어떤 일이라도 진심을 다해 일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일 자체에서 오는 기쁨을 알았다. 나는 이 일이 좋았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내가 한 일로만 냉정하게 평가받는 것이 좋았다. 물론 평가는 나쁠 때도 많았다. 초년생 때는 그런 평가를 받으면 일과 나를 분리시키지 못해 눈물부터 났다. 지금도 아주 분리시키지는 못한다. 다만 지금 별로여도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라고 생각한다. 일은 노력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더 쏟으면 결과는 어떻게든 더 좋아졌다. 이번이 아니라 다음 일에서라도. 결과물이 좋아지니 실력과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만큼 권한도 받을 수 있었고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젝트도 꽤 많이 할 수 있었다.
내 진짜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자아로 사회에서 역할을 하는 것이 좋았다. 워라밸은 일쪽에 치우쳐져 있었지만 일의 자아를 배우는 과정이라 여겼다. 일하는 자아를 가진 사람은 그 나름의 쓸모를 증명해냈다는 점에서 활력이 있다. 그건 내가 어제 실연을 당했어도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회사에서 내 몫을 해내면 그런대로 평소와 비슷한 하루가 된다. 때로는 일이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 사회적 자아도 부분이기는 하지만 ‘나’이기는 하니까.
태도를 배우고 어느 정도 입장 정리를 하니 일에 재미가 붙었고 실력도 금방 늘었다. 그러니까 옮기지 말고 한 회사만 계속 다니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그만두는 길도 있었지만 나는 부러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누가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버텼다. 그만둔 사람도 그만두지 않은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냥 여기서 싸우길 선택한 거고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다른 싸움을 선택한 거다. 힘들었지만 계속 버텼다. 버티다 버티다 어느 날부터는 잽도 날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쨌든 이 회사에서 죽지 않고 성장해냈다.
배우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좋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걸 이기는 재미와 배우는 게 있다면 계속 다녀보는 것도 좋다. 사실 뭐든 배울 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중에 배우고 싶은 게 없는 거고 그 회사와 방향이 맞지 않는 거다. 배우는 게 있어도 너무 힘들고 버거워 내가 사라지는 것 같고 성취감도 재미도 느끼지 못하겠다면 그만두는 것도 답이다. 한 발짝 벗어나서 나를 다시 재정비해도 된다.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게는 나 자신이 제일 중요하니까. 또 뭐, 세상에 회사는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