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낮추니 거기에 내가 있었다.
눈을 낮추니 작은 조직보다 더 먼지 같은 내가 보였다. 온전히 스스로 선택해서 눈을 낮춘 게 아니다. 충분히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는데 작은 회사에 간 게 아니다. 나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돈 내고 미대나왔으니 적당히 인지도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학부 때 딱히 한 게 없었다. 디자인 철학도 딱히 없고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면 될 거야 생각만 할 뿐 뭘 하진 않았다. 그냥 그 상태로 졸업했다. 기업에서 뽑는 디자이너 총수요는 적은데 공급(졸업생)은 넘쳐난다. 그러니 이 친구는 하면 될 거 같은데, 하고 뽑는 회사는 별로 없다. 할 줄 아는 게 없네 할 뿐.
몇 번의 서류와 면접 광탈을 겪고 기준을 정했다. 월급 안 떼어먹고 (물리적으로) 때리지만 않으면 그냥 다니자. 그리하여 다니게 된 회사는 당연히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회사, 일명 가족 같은 회사였다. 작은 회사답게 면접 후 입사도 일사천리였다. 면접보고 돌아오는 길에 붙었고 그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하라고 했다. 그냥. 그 시기에 나는 어떤 면에서 태평했고 웬만한걸 ‘그냥’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냥 들어간 작은 회사는 생각보다 컸다. 별거 아니어 보이는 일도 막상 하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이건 그냥 하지, 하고 나면 눈앞에 보이는 건 디자인이 아닌 똥이었다. 몇 번 털리고 나니 입사 한 달 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가야겠다, 똥꼬 빠지게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그런 다짐과는 별개로 안팎으로 왜 그런 작은 회사에 다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얼른 퇴사하고 더 좋은 데 가라고. 지금도 그 말 들을걸 하고 후회를 아주 안 하는 건 아니다. 생각하면 후회스러울 것 같아 생각 안 하기로 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주변의 말대로 퇴사를 했더라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퇴사를 했지만 결국 좋은 회사를 못 찾고 더 이상한 회사를 전전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열심히 준비해서 더 좋은 회사에 갔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선택지에서 그때의 나는 계속 내 결정을 끝까지 밀어붙여보는 걸 선택한 것뿐이다.
우리는 대부분 나를 세상에 맞추는 것과 세상을 나에게 맞추는 것의 사이 어디쯤에서 선택을 한다. 나를 완전히 세상의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도 어딘가 있겠고, 반대로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나만의 기준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도 있을 거다. 사람들은 대부분 저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 둘 다 아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 쯤에 있는 보통의 인간이다. 그래 이건 보통이다. 다들 저 둘을 지향하지만 결국 보통은 그 사이에 있는 것 아닌가. 그냥 처음부터 보통의 인간을 지향하면 안 되는 걸까. 요즘은 뭐든 멀리서 보면 기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 다 그렇지는 않았다. 기회가 있는 것처럼 보인 거였다. 지금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지만 사회초년생인 나는 더더욱 몰랐다. 일단 뭐라도 선택했고 그게 일단 어디든 취업이었다.
작은 우물을 선택했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건 싫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랬다. 택배 받고 손님 안내하는 등 디자인과 무관하고 쉬운 일부터 내 기획과 디자인을 어떻게 하면 더 좋아 보이게 할 수 있는지까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뭐라도 배우려고 했다. 동시에 회사에서 얻지 못하는 인프라를 채우기 위한 혼자만의 분투도 시작했다. 대부분 실용서적은 아니었지만 대학교 때까지는 쳐다도 안 보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주정에 가까운 내용이었지만 일기도 꾸준히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시간이 그저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이 되길 바랬다. 눈을 낮추니 내가 처한 현실이 보이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보였다. 세상은 컸고 나는 가진 게 없었다. 나는 작은 곳에서부터 나를 키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