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에이전시는 고객 요구에 맞춰야 하는 부분이 많다. 내가 다닌 곳도 늘 시장 흐름에 맞춰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고 개선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기 바빴다. 시스템을 만들기보다는 그때그때 대응하는 유동성에 집중했다.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회사에 다녔다면 좀 더 편했을 건 같다. 다행히? 첫 회사라 시스템이랄 게 없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일의 체계가 없는 곳에서는 늘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알려주고 도와주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다들 자기 지키기 바쁘다.
자신을 야생에 태어난 한 마리 초식동물이라고 생각하자. 무리를 잘 따라다니며 옆에서 보고 배워야 한다. 안 그럼 사자같은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쉽상이다. 어미젖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정말 처음 배울 때만. 그때 많이 물어보고 익혀두라. 젖 먹을 시기가 지나서 물어보고 젖 주기를 기다리다가는 회사생활이 많이 힘들어진다. 문명이 발달한 세상인 줄 알았는데 21세기에 야생이라니 서글퍼질 수도 있다. 대신 이런 환경을 잘 이용하면 빠르게 성장하고 나에게 적합한 일 루틴을 빠르게 찾을 수 있다. 알아서 잘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말이다.
늘 흔들리는 갑판 위에 서있는 게 힘들긴 했다. 그럼에도 계속 다녔던 이유는 뭘까. 어떤 연대감이 있었다. 일단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위에 대표나 선임, 다른 동료들이 놀고 있었다면 안녕히 계세요, 했을 것 같다. 힘들어도 좋은 걸 만들어보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이 일을 좋아해서 시작했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떠넘기려 각재는 동료도 없었다. 다들 어떤 방식으로든 의지를 가지고 일했다. 그 의지가 늘 다른 의지에 의해 꺾이긴 했지만 모두가 조금씩 힘을 모았기에 돌이켜보면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다. 같이 고생한 사람들에게 전우애를 느낀다. 진짜 전쟁 같았다. 그중에는 나와 생각이 맞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별개다. 열 일하는 동료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너무 짠하다. 같이 일하는 대표나 동료들과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무언가가 있었다. 막상 이야기해보면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뭘 또 그렇게까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문제로 씨름하면서 그냥 눈길 한 번 더 주고 잘되길 바라고. 그런 게 연대 아닐까.
그럼에도 시스템은 이제 단순히 업무환경개선 차원이 아닌 생존이 달린 문제다. 더 이상 ‘열’과 ‘정’만으로는 회사를 키울 수 없다. 아무도 그렇게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이 유난히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시대가 그런 거다. 작은 조직들은 유독 왜 체계가 없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체계를 만들어도 그걸 실행할 사람이 없어서다. 또 디자인 조직은 업무 특성상 시장 변화와 고객 요구의 영향을 심하게 많이 받는다. 오퍼레이터가 되기 쉽다. 외부의 변화, 요청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바쁘다. 집에 갈 시간도 없는데 체계를 만들고 테스트할 시간이 어디 있나. 아이러니하게 체계가 없어 집에 못 가는 거지만.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사람을 더 뽑기 전에 누가와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 정비에 더 자원을 쏟아야 한다. 작은 조직이 처음부터 엄청 대단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냥 작은 업무 규칙부터 하나씩 만들어가도 된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조바심 느끼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