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던 J는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서로 의지하며 허물없이 지낸 친구이다.
종종 갈등의 상황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며 해결하기보다는 우정이라는 이름하에 덮어두고 회피를 했었다.
몇 해 전 나는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옮기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친구에게 신경을 쓸만한 여유도 없었다.
만남의 요청도 미루기를 여러 차례.
J에게서 안부차 온 문자 메시지에 답글을 하면서 사소한 오해가 발생했다.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화를 내는 친구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가 싫어서 친구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그해의 마지막 날 J에게서 신년인사 메시지를 받았지만 난 형식적인 답변으로 응대했다.
그때의 난 이 메시지를 끝으로 우리가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 문학동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오래도록 나는 그 사실을 곱씹었다.
의도의 유무를 떠나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나, 때때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나.
<내게 무해한 사람 p.324>
2013년 '쇼코의 미소'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문학계에 등단한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발표했던 중단편의 소설들을 다시 퇴고하여 만든 모음집으로 총 7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은 '고백'이라는 단편의 문장 일부분에서 나온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10대에서 20대의 청춘들이다.
순수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녔지만 그만큼 모든 것에 불안정하고 미숙할 수밖에 없어 관계 안에서 동요하며 인생이 뒤흔들리기도 한다.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며 가족이라는 족쇄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서툴고 어설펐기에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이 상대를 아프게 했음을 시간이 흘러 뒤늦게 깨닫게 되고 지금 내 곁에 없는 그 사람의 빈자리를 그리워한다.
악의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내 말과 행동에 상처받았을 J가 생각이 났다.
그로 인해 생긴 관계의 균열은 나에게 고스란히 아픔으로 남았다.
그 당시의 내가 좀 더 성숙한 태도를 보였다면 지금 우리의 관계는 어땠을까.
음유시인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의 가사 말 중에 '세상 모든 것에는 갈라진 틈이 있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힘들어하며 깨어지고 부서지지만 그 틈으로 들어온 빛으로 인해 더욱 단단해지며 성숙의 길로 한층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련한 기억 속에 너와 나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 『내게 무해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