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여름 / 알베르 카뮈 / 녹색광선
잠시 후 압생트 풀밭에 몸을 던져 그 향이 몸에 배게 할 때, 나는 모든 편견에 맞서 진리를 실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진리는 태양의 진리이고, 또한 내 죽음의 진리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내가 지금 내거는 건 다름 아닌 내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지금 울기 시작하는 매미들로 가득한 삶, 미풍은 상쾌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꾸밈없이 이 삶을 사랑하며, 이 삶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싶다.
결혼·여름 p.23
책의 얼굴은 표지라고 생각한다.
일러스트와 색감, 글자의 크기와 배치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표지는 자연스레 눈길을 끈다.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여러 책 중에서도 결국 손이 가는 것은 시선을 잡는 디자인이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결혼· 여름』 역시 여러 가지 버전의 표지가 있다.
내가 가진 책은 하늘색 바탕 위에 바다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연인의 모습이 담겨있다.
시원한 바다와 청량한 색감은 책장을 펼치기 전부터 달콤한 상상을 자아낸다.
이미 카뮈의 소설 『이방인』과 『페스트』를 읽었던 터라 그의 에세이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그러나 달콤한 사랑 이야기와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펼친 책장은 예상과 달리 삶과 세계를 향한 카뮈의 깊은 사유가 고스란히 담긴 철학적 에세이였다.
나는 바다에서 자랐고, 바다가 있어 가난도 내게는 호화로웠다.
결혼·여름 p.177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이른바 '피에 누아르'(pieds-noirs)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 삼으면서 수많은 프랑스인이 알제리로 이주했고 카뮈의 조부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꿈을 품고 떠났을 이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카뮈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는 청각장애와 문맹으로 생계를 제대로 꾸리기 어려웠다.
그는 상급학교 진학조차 쉽지 않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알제리의 강렬한 햇살, 눈부신 바다, 사막과 언덕을 스치는 바람 같은 자연 풍광은 그의 감수성을 끝없이 자극했다.
결핍과 풍요가 공존했던 어린 시절 환경은 그의 사유의 뿌리가 되었고,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시냇물과 강물은 지나가지만 바다는 지나가고 머문다.
바로 그처럼 순간적이면서도 충실하게 사랑해야 하리라.
나는 바다와 결혼한다.
결혼·여름 p.181
『결혼· 여름』에서 카뮈는 단순히 연인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결혼과 여름이라는 두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태양과 바다, 계절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폐허가 된 티파사의 풍경 속에서는 인생의 덧없음을 성찰하게 한다.
그의 글은 철학적 사유를 시적인 언어로 풀어내어 쉽게 이해되진 않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음미할 때마다 마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듯한 기쁨이 찾아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와는 하등 상관없는 거부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세상의 모든 훗날을 고집스레 거부하는 것은 또한 내 앞에 놓인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결혼·여름 p.33
카뮈는 삶을 '행복한 수수께끼'라 불렀다.
답을 알 수 없는 길 위에서도,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바로 이런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대와 도덕을 거부하고, 현재 느껴지는 감각에 충실하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법정에서도 그는 위선을 거부한다.
삶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햇빛과 바닷바람, 담배 한 모금에서 삶의 순간을 충실히 느낀다.
뫼르소의 이런 태도는 단순한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허무주의가 의미를 부정하고 무기력에 머무른다면, 카뮈는 삶의 무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살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부조리는 세상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삶을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초인적인 행복이란 없고, 하루의 흐름 이외에 영원한 건 없음을 깨닫는다.
부질없으나 핵심적인 이 행복, 이 상대적 진실만이 오직 나를 감동시킨다.
결혼·여름 p.53
카뮈의 글을 읽으며 인간이 현재를 온전히 살아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가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주인공은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고, 죽음과 상실을 예감하면서도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카뮈가 말한 '지금 이 순간을 감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뀌지 않는 미래를 알면서도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태도 그것이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이다.
카뮈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반항하는 인간'으로 표현했다.
인간은 부조리와 무의미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순간순간을 충실히 살아간다.
시지프가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아낸다.
불확실하고 무상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롯이 살아내는 일이다.
나는 내 배역을 훌륭히 수행했다.
인간이라는 내 직업을 완수했다.
내게는 하루 종일 기쁨을 누린 것이 특별한 성취라기보다는 어떤 경우엔 행복해야 할 의무가 부과된 우리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로 여겨졌다.
이후엔 고독이 찾아들었으나, 이번엔 만족감 속의 고독이었다.
결혼·여름 p.26
삶은 수수께끼이며 부조리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고독을 받아들이며 오늘을 살아간다.
인간이라는 '직업'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카뮈가 말하는 행복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일지 모른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순간순간을 행복으로 채우고 싶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