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 위화 / 푸른숲
몇 년에 걸쳐 이 모든 일을 한 번씩 다 시도해 보고 결국 처참히 실패하고 만 뒤, 나는 내 머릿속 좋은 엄마의 정의를 180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만 낳으면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p.26
아이만 낳으면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가사와 육아, 직장에 치이며 살아가는 워킹맘들이 여자에서 진짜 엄마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담은 에세이집이다.
읽는 내내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며 위로를 받고 동시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너무 빨리 자라 아쉬울 때도 많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는 빨리 커서 덜 힘들게 해주기를 바라던 순간도 있었다.
엄마를 보며 방긋 웃던 아이,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던 아이는 어느새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었는데 나는 과연 부모로서 얼마나 성장해 왔을까.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안으며 특별한 선물을 받은 듯 행복했다.
언제까지나 내 품 안에 머물 것 같았지만 아이들은 자라며 부모의 손길을 벗어나 자기만의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부모라는 존재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점점 작아져 간다.
첫째 아이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예상치 못한 유학길에 올랐다.
주말에 안부 인사라도 전해주면 좋으련만 잘 적응한 탓인지 뜸하게 연락을 하곤 했다.
'엄마 껌딱지'라 불릴 만큼 늘 내 곁을 맴돌던 둘째마저 사춘기에 접어들자 친구가 먼저였고 집에 돌아오면 자기 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다.
아이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왠지 모를 허전함과 서운함이 뒤따랐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첫째와는 그동안의 공백만큼이나 큰 거리가 느껴지기도 했다.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충돌하는 시간 속에서 아이의 성장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내가 쉬지 않고 피를 파는 건 이거 말고는 별수가 없기 때문이야. 내 아들이 상하이의 병원에 있는데, 병이 아주 심하다네. 그래서 돈을 아주 많이 모아 가야 하거든. 돈이 없으면 의사가 주사도 안 놔주고, 약도 안 줄 테니까"
허삼관 매혈기 p.317~318
이번 주에 읽은 『허삼관 매혈기』는 그 깨달음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아들인 줄만 알았던 일락이가 사실은 다른 이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허삼관은 분개한다.
가장 사랑했던 아이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치지도 못하는 그의 마음이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락을 업고 국숫집을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허삼관이 진짜 부모로 한 걸음 내디뎠음을 보았다.
이후 일락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허삼관의 모습에서는 부모라는 무게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허삼관은 세 아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만을 위한 매혈을 결심한다.
그러나 젊은 혈두는 나이 든 허삼관을 비웃으며 매혈을 거절했고 아들들의 따가운 핀잔은 그를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그때 그의 마음을 알아준 이는 아내 허옥란이었다.
옥란은 허삼관이 먹고 싶어 하던 돼지 간 볶음과 황주를 사주며 무심한 듯 다정하게 남편을 달래준다.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허삼관 매혈기 p.205
자녀는 부모 품에 잠시 맡겨졌다가 언젠가는 세상으로 떠나야 할 존재다.
그 시간까지 잘 돌봐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몫이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붙잡음'이 아니라 '놓아줌'에 가깝다.
아이가 자기 발로 서고 걸어갈 수 있도록 때로는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와도 곁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이 바로 부모라는 자리의 무게일 것이다.
자녀가 가정이라는 둥지를 떠나면 결국 부부만 남는다.
젊은 날의 열정은 사그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서로를 향한 이해와 연민이다.
그것이 부부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 아닐까.
부모로, 부부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하루하루 서로를 이해하고 놓아주는 법을 배우는 여정이다.
그 속에서 웃고, 울며 서로를 보내야 할 순간도 마주한다.
그 모든 시간이 모여 인생의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