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깨알 재미 / 손유미 / 파랑새
한자의 깨알 재미'가 제 유튜브 채널명인데요.
여기서 '재미'는 우리가 흔히 쓰는 표준어로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단어라 의심의 여지도 없이 쓰고 있는데 이 말속에 숨은 한자 뜻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한자의 깨알 재미 p.160
얼마 전, 새온독 정기모임이 서울에서 있었다.
유홍준의 『나의 인생 문화 답사기 - 서울 편』을 함께 읽었던 터라 우리는 창덕궁을 찾았다.
어렵게 예약해 들어선 창덕궁 후원에는 가을의 색채가 고요하게 깃들어 있었다.
산책하듯 걸었던 그 길은 오래 기억될 순간들로 차곡히 쌓였고 그날은 선배님의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까지 이어져 더욱 특별했다.
그 축하의 주인공은 손유미 작가다.
손유미 작가는 중국어를 전공하고 한자를 가르치며 한자와 연결된 우리말의 뿌리에 흥미를 느꼈고 그 매력을 쉽고 재미있게 유튜브에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개그맨 정형돈의 '제목없음 TV'에 출연해 재치 있는 언어 감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기루'는 순우리말 같으나 한자어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新) 기루인가? 기루는 또 뭐지?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신기루'는 대기 속 빛의 굴절에 의한 착시나 환상 효과인데, 그렇다면 아주 오랜 옛날 신기루는 어떻게 비쳐서 만들어진 말일까요?
신기루라는 말속에는 상상의 동물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자의 깨알 재미 p.188
『한자의 깨알 재미』는 우리가 매일 쓰는 단어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이다.
너무 익숙해 무심코 사용하던 말들이 사실은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책 속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말 속 동물 비유였다.
정곡(正鵠)은 과녁의 한가운데 점을 뜻하지만 '정'의 민첩함과 '백조'의 높고 멀리 나는 이미지에서 유래했고, 응시(凝視)에는 매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사진(長蛇陣)에는 뱀이 길게 뻗은 모습이 숨어 있다.
호구(虎口)는 원래 '범의 아가리'로 위태로운 상황을 뜻했지만 지금은 '만만한 사람'이라는 전혀 다른 쓰임까지 갖게 되었다.
일상 언어가 이처럼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자식(子息)에 왜 이 息(숨 식)이 쓰였는지 알고 보면 참 절묘합니다.
자식에게 내 숨결을 나눠줬기 때문일까요?
숨을 쉬는 것은 곧 생명의 존재를 뜻합니다.
고로 자식의 '息'은 '숨을 쉬다'에서 시작하여 생존하고 자라고 번식하다 등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중략)
자식이 장성하여 출가를 하면 부모는 자식의 소식( 消 사라질 소, 息 숨 식 )을 늘 궁금해합니다.
소식이란 죽음과 삶을 비유하는 말로, 그 옛날엔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한자의 깨알 재미 p.48~49
자식(子息)의 식(息)이 '숨'을 뜻한다는 사실에 그 단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숨은 곧 생명이고, 생명이 이어져 번식하고 성장한다.
그래서 자식이 집을 떠나 있으면 부모는 자식의 소식(消息)을 기다리게 된다.
소식이 오늘날 안부나 뉴스를 뜻하지만 예전에는 생사를 확인하는 절박한 말이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소식'이라는 단어에 어린 시절 시계탑 아래에서 친구와 약속을 잡고도 서로 엇갈려 만날 수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집간 딸의 안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딸의 풍경까지 이어진다.
지금 아이들은 이런 감정의 결을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언어는 이렇게 시대의 감수성을 품은 채 흐른다.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에는 사라져 가는 언어를 보존하기 위한 '소수 언어 박물관'을 세우고 마지막 화자들을 전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같은 언어로 소통할 사람이 모두 사라져 평생 고독 속에서 말을 그리워하던 마지막 화자가 눈을 감는 순간 그 언어도 함께 사라진다.
그 모습은 내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말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언어학자들은 21세기말이면 3000~6000개의 언어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나라의 제주어 또한 소멸 위기 언어에 속한다.
말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단어가 없어지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던 한 방식이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누군가와 같은 말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큰 축복처럼 느껴진다.
『한자의 깨알 재미』는 우리가 쓰는 말의 근원을 쉽고 흥미롭게 안내해 주며 익숙한 단어를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아이들에게도 한두 장 들려주며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의미를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훈하다'는 熏(향초 훈)으로 향초처럼 은은한 향내를 내 뿜 듯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따스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음 훈훈한 일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한자의 깨알 재미 p.195
책을 사이에 두고 같은 문장을 붙잡고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새온독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창덕궁 후원도 그랬다.
온라인 예매가 실패해 후원 관람을 포기하던 순간, 서울에 사는 선배님들이 아침 일찍부터 매표소 앞에 나가 우리 몫까지 표를 구해주었다.
덕분에 가을 햇살을 머금은 왕의 정원을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어서 가능한 배려, 같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어서 가능한 순간이었다.
그날의 풍경과 마음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