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끊임없이 복원되어 가는존재

대온실 수리 보고서 / 김금희 / 창비

by 솔솔부는 책바람

이해하면 미움만은 피할 수 있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p.157


독서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다 보면 혼자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문장을 누군가의 시선 덕분에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서로 다른 해석이 오갈 때 책은 한 사람의 경험을 넘어 각자의 삶 속에서 다시 쓰이기 시작한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김금희 작가의『경애의 마음』을 읽었다.

한 선배님께서 김금희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언급하며 작품 속 인물에 대한 해석이 다양했다고 이야기했다.

최근 작가를 직접 만난 이후로 김금희 작가의 글에 빠져 있던 나는 꽂아두기만 했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대 온실 수리 보고서 p.17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창덕궁 대온실 복원 과정을 따라가며 무너진 기억과 관계,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다시 세워지는 모습을 담아낸다.

작품의 첫 문장에 등장하는 '중수', '중창', '재건'이라는 건축 용어는 단순한 기술적 언어를 넘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한 사람의 의지처럼 읽힌다.


주인공 영두에게 무너진 자리는 '낙원 하숙'이었고 그곳에서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창경궁 대온실 보수 공사의 백서'를 기록해 달라는 제안을 망설였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창경궁은 낙원 하숙과 가까웠고 그 주변은 영두에게 그리움과 억울함이 뒤섞인 장소였다.

영두는 언제나 '지워버림으로써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잊어야만 살 수 있었던 공간들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한때는 근대의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대중적 야앵의 배경지로,

역사 청산의 대상으로 여러 번 의의를 달리 한 끝에 잔존한 창경궁 대온실은

어쩌면 '생존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건축물과 함께 그 시절 존재들이 모두 정당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에게도 이해되기를.


대온실 수리 보고서 p.410


창경궁은 영두에게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도 상처의 공간이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일제는 순종을 창덕궁에 머물게 하고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며 대온실을 세웠다.

궁궐의 위엄을 지우려는 듯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벚나무 천여 그루를 심어 유원지로 만들었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이 일들은 조선의 존엄을 해체한 폭력이었다.


복원 작업이 한창이던 어느 날,

대온실의 지하에서 뼈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되자 행정 담당자는 이를 덮으려 한다.

그러나 영두는 덮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 속에 더 깊이 묻는 일임을 알기에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낙원 하숙의 주인, 문자 할머니의 삶을 따라가며 자신을 가두던 어두운 터널에서 걸어 나온다.


문자 할머니는 평생 사기와 배신을 겪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 믿음에는 어린 시절,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다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문자 할머니의 사람에 대한 믿음은 세대를 넘어 영두와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작품에는 유난히 '이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해란 단순한 공감이나 동의를 넘어 타인의 삶 속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상상하고 그 감정의 자리에 잠시 서보려는 노력이다.




대온실이 국가등록문화재이긴 한데 좋은 마음으로 안 보게 되잖아요.

일제 잔재라고. 창경궁 복원공사 때 다른 시설 다 철거되는데 겨우 살아남았죠.

생존 건물인 셈이에요.


대온실 수리 보고서 p.33


일제 청산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창경궁 대온실은 존폐의 논란 한가운데에 있었다.

누군가는 식민지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 했고 또 누군가는 그마저도 우리의 역사라고 말했다.

김금희 작가는 식민의 흔적을 품은 대온실과 잔류 일본인 시즈미 마리코의 삶을 교차시키며 과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문자 할머니는 시즈미 마리코라는 이름도, 양부가 지어준 '박진리'라는 이름으로도 갈아가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문자 할머니는 가해자의 잔재였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대의 폭력 속에서 그저 살아남은 한 인간이었다.




장 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대온실 수리 보고서 p.209~210


과거를 복원한다는 건 상처를 치유하거나 미화하는 일이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고 기억할지 스스로 묻는 일이다.


영두에게 복원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었고 끝까지 바라보는 용기였다.

김금희 작가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통해 불편한 진실을 덮지 않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새로운 의미를 쌓아 올린다.

사람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복원되어가는 존재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임을 일깨우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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