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멸종 / 크리스틴 로젠 / 어크로스
기술은 많은 인간 경험을 변화시켰다.
기술이 인간 경험을 막거나 금지한 것은 아니다.
기술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해 매개가 없는,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둔 즐거운 경험들이 일상생활에서 갖는 중요성과 의미를 약화시킴으로써 인간 경험을 변화시켰다.
경험의 종말 p.18
동전 몇 개를 쥐고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뒷사람을 배려하며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하던 그 짧은 순간 속에서 우리는 기다림과 절제를 배웠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그 경험은 사라졌다.
편리해진 만큼 우리는 예전의 방식들을 잊어갔고 점점 더 개인화되었다.
이제 우리는 많은 것을 기술에 맡긴다.
기억은 소셜미디어에, 호기심은 검색창에, 방향 감각은 GPS에 의존한다.
편리함의 대가로 스스로 감각하고 사유하던 일들은 줄어들었다.
크리스턴 로젠은『경험의 멸종』에서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인간다운 경험' 그 자체이며 그 불편함이야말로 세상을 직접 느끼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소비하는 쾌락, 즉 당신이 남기는 데이터의 자취가 곧 당신이다
경험의 멸종 p.225
처음 온라인 독서모임을 시작했을 때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화면 너머의 침묵이었다.
상대의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내 말이 제대로 닿았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인간은 서로를 읽는 존재다.
하지만 디지털 화면은 눈빛과 표정으로 전해지던 신호를 지워버렸고 공감의 깊이는 그만큼 얕아졌다.
지루함도 사라졌다.
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 여백의 순간이 창의적인 몽상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제는 짧은 영상이 그 틈을 주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내가 머문 시간과 반응을 따라 설계된 콘텐츠로 시선을 빼앗는다.
거대 테크 기업이 우리의 주의력을 상품으로 삼는 사이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문다.
그 영향은 우리의 경험 방식까지 바꿔 놓았다.
여행의 풍경도 달라졌다.
검색으로 장소를 찾고 후기에 맞춰 동선을 짜는 효율적인 여행이 되었지만 그만큼 우연은 줄어들었다.
길을 잘못 들어 발견하는 골목의 작은 카페나 예상치 못한 풍경이 주는 세렌디피티는 점점 사라져 간다.
먹거리 역시 다르지 않다.
특정 디저트나 음식이 빠르게 유행하고 또 다른 메뉴가 그 자리를 금세 대신한다.
우리는 발견하기보다 '추천된 것'을 소비하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 백일몽, 발견에 대한 기대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경험의 멸종 p.126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더욱 중요해진다.
문명의 이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장단점을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경험의 멸종』을 읽으며 내가 자연스럽게 잊어버린 감각들 그리고 애초에 가져보지 못해 잃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감각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몽당연필을 볼펜에 끼워 끝까지 쓰려했던 손의 기억, 연탄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 시간을 맞추던 저녁,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묵묵히 기다리던 시간, 낯선 동네를 걸으며 몸으로 읽혔던 방향감각.
작고 사소해 보였던 순간들 속에 삶을 살아내던 감각이 담겨 있었다.
아는 순간 선택이 시작된다.
편리함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어색했던 화면 속 만남이 책과 삶을 나누는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듯 기술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 태도 안에서 기술은 경험을 풍요롭게 확장하는 통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