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윳빛 자와 악어 뱃속

백야 / 악어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문학동네

by 솔솔부는 책바람

나이도 어느 정도 있고 외모도 어느 정도 되는 한 신사가 파사주에서 악어에게 흔적도 없이 산 채로 먹혀버린, 그리고 그 일의 결과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실화.


백야 / 악어 P.207


독서모임에서 도스토옙스키의『백야』를 문학동네 판본으로 읽고 있다.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을 하루에 한 편씩 천천히 읽어 가는 중이다.

그동안 익숙했던『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주는 묵직한 구원의 서사와는 결이 다르다.

짧은 이야기들은 매번 예상을 비껴가며 끝나고 그 여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거장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오늘 읽은『악어』 도 그랬다.

한 남자가 전시실에 있던 관람용 악어에게 통째로 삼켜지지만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상황을 발판 삼아 이름을 알리겠다는 황당한 포부까지 드러낸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더 기가 막힌다.

누구 하나 서둘러 그를 구하지 않는다.

악어 주인은 재산 피해를 걱정하고 관리들은 사건이 불러올 파장을 계산한다,

사람보다 앞서는 것은 각자의 이해관계였다.



누군가의 생명과 누군가의 소유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상으로 받아오신'우윳빛 자' 하나가 있었다.

매끄럽고 단단한 재질에 다양한 모양을 그릴 수 있는 기능까지 갖춘 무엇보다 내 취향에 꼭 맞는 물건이었다.

다음 날 나는 그 자를 학교에 가져갔고 앞자리 친구의 손가락이 자의 구멍에 끼어 빠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자를 잘라야 했다.

싫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선생님은 내 동의를 구한 뒤 자를 잘랐고 친구의 손가락은 빠져나왔다.



사람을 살리려면 악어의 배를 갈라야 한다.

그러나 악어 주인은 그것이 자신의 재산이라며 반대한다.

우리는 쉽게 그를 비난한다.

어떻게 사람보다 재산이 먼저일 수 있느냐고.

하지만 그 서늘한 잣대를 막상 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타인의 고통과 맞닿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치열하게 계산하고 결국 무게 추를 자기 쪽으로 기울인다.

의사 파업, 전쟁, 혐오 시설을 둘러싼 갈등까지 수많은 사회적 불협화음은 결국 각자의 '우윳빛 자'를 지키려는 마음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파열음인지도 모른다.




내가 악어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잖나, 그러니 녀석을 영원히 배부르게 해준 셈이지.

이제 앞으로 몇 년간 녀석에게 먹이를 안 줘도 될 걸세..

다른 한편으론, 나 때문에 배를 채웠으니 이제 녀석이 자연스럽게 자기 몸의 생명수를 내게 전해줄 거고 말이야.

(중략)

그렇게 내가 녀석을 먹이고, 반대로 나도 녀석에게서 영양분을 얻고 있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먹여주는 사이인 셈이지.

(중략)

아무튼 이 괴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아주 조심한다네.


백야 / 악어 P.243~244


소설 속 이반 마트베이치는 악어 안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악어의 배를 채워주었으니 악어 역시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 믿는다.

그 공생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한다.

탈출해야 할 감옥을 어느새 보호받는 자리로 둔갑시킨다.



억압처럼 느껴졌던 구조도 어느 순간 익숙해진다.

돈, 인정, 안락함.

그것을 '안정'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뒤척임을 멈춘다.

악어 속 남자처럼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 안에 머무는 것을 섣불리 잘못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나 역시 그 온기에 기대어 삶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잊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의 손가락을 위해 내 소중한 '우윳빛 자'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쉽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

내 안에도 악어 주인의 마음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기심을 부정하지 않는 것.

내가 어떤 악어 속에 살고 있는지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

어쩌면 변화는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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