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T 게임 제작기 2
2023년.
가장 아팠던 시절의 일이다.
심리학과 정신 건강에 대해 이모저모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삶에서 실천한다는 건 여전히 어렵게 느껴졌다. (이 부분은 늘 어려운 것 같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툭하면 감정에 휘둘리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스스로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럴 때면 자괴감과 자기혐오에 우울은 깊어지고 덩달아 통증까지 더 심해지곤 했다.
하지만 그때 접하게 된 인지행동치료(CBT)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조금씩 바꿔 놓았다.
CBT가 도움이 됐던 건 막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아질 거야" 혹은 "버티다 보면 +언젠가 나아질 거야"라는 위로보다,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생각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하는지, 왜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지를 조금씩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막막함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에서도 지금 이 순간 내 생각을 점검하고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CBT를 통해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워가던 그 시기에 전혀 다른 곳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의 나에게 소설과 게임은 일종의 도피처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접한 게임의 한 캐릭터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캐릭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쓰고 보니까 한마디가 아닌 여섯 마디다..)
- 자신의 결과물에 완벽주의를 가지고 있고
- 감정을 감추려 하지만 오히려 더 솔직하게 드러나며
- 책임감이 강한 만큼 스스로를 억압하고
- 과거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털어내지 못하며
- 생각이 깊고 집요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
- 알코올 중독.(이 점은 나와 다르다.)
어쩜 이렇게 나랑 내면이 닮았을까 싶었다.
(다만, 이 캐릭터는 천재에 미인이었으나 나는.... 나는....)
그런데 플레이어의 눈으로 봤을 때 그 캐릭터의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트라우마로 과거를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충분히 멋지고 잘 살 것 같은 캐릭터였는데, 오히려 본인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 이해가 되면서 복잡하고 답답한 캐릭터였다.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뭐 이렇게 부정적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자면 그 캐릭터를 보는 내내 마음 한 켠이 찔렸었고 나중에는 쌓이고 쌓인 찔림에(?) 평소의 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 나도 누군가의 눈에는 저렇게 보이겠구나..."
"나도 저 캐릭터처럼 나의 슬픔에 매몰되어 있어서 나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타인의 삶을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다가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경험. 내 고통이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내가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CBT에서 말하는 탈중심화, 즉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이었다.
이후 게임과 소설, 여러 매체를 통해 유사한 경험들을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창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일수록 그 안에서 치유와 위로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치유받을 수 있지 않을까?'
'CBT를 공부하거나 직접적인 훈련을 하는 게 아니더라도, 가상의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고 패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음... 그냥 내가 한 번 해볼까?'
어이없게도 이렇게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나는 개인의 삶과 경험을 한 권의 책이자 이야기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프로젝트도 당연히 이야기 위주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문제는 긴 글을 읽는 게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기에,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직접 선택하는 경험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였다.
복잡한 조작이 필요 없으며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구조가 내가 추구하는 방법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지금 만들고 있는 게임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