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주부가 있었다

by 솔솔솔파파

태초에 물과 공기가 있었다. 사람은 그것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물과 공기를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너무 당연해서, 늘 곁에 있으니까. 내 삶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첫 기억 속에서 언제나 곁을 지키던 사람, 바로 엄마였다. 엄마의 직업은 주부였다. 나에게 주부는 곧 엄마였고, 엄마는 곧 주부였다. 내 생의 태초에는, 주부가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물을 마시며 감사하지 않듯, 공기를 들이쉬며 경이로워하지 않듯, 엄마의 돌봄도 그저 당연한 배경처럼 여겼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엄마는 내게 가장 완벽한 주부이자 최초의 주부였다.


어릴 적 엄마는 마치 마법사 같았다. 낮에는 아빠의 가게 일을 도우시다가도 저녁이면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들 앞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칼을 잡으셨다. 탁탁탁, 툭툭툭, 슥슥슥—리듬감 있는 소리가 부엌에 울리면 어느새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뚝배기에 말랑한 두부, 양파, 버섯, 조개가 들어간 구수한 국물.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밥에 슥슥 비벼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부엌은 엄마의 마법 창고였다. 들어가신 지 잠시 후면 언제나 맛있는 반찬이 완성되곤 했으니.


엄마의 요리에는 분명한 리듬이 있었다. 손은 멈추지 않고 춤추듯 움직였고, 발은 미리 계산된 동선대로 움직였다. 머리는 지휘자, 손과 발은 오케스트라 단원 같았다. 나는 그 연주를 무심히 지켜보며 자랐고, 덕분에 매일의 식탁은 풍성했다. 그 모든 돌봄을 받으면서도 몰랐다.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또 얼마나 값진 헌신인지. 그저 누구나 이렇게 의식주를 당연히 제공받는 줄 알았다.


“엄마, 내 줄무늬 남방 어딨어요?”

“거기 두 번째 서랍 열어봐.”

“엄마, 나 학교에 30cm 자 가져가야 하는데…”

“거기 공구 서랍에 넣어놨지.”


엄마는 집안의 모든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다. 살아 있는 GPS 같았다. 내가 찾는 물건의 좌표가 엄마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간혹 좌표가 없는 경우에도, 탐정처럼 내 동선을 추적해 찾아내셨다. ‘어떻게 엄마는 모든 걸 다 아실까?’ 어린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는 손재주도 뛰어나셨다. 뜨개질, 바느질, 미싱, 못 하는 게 없으셨다. 작은 컵 받침부터 피아노 커버, 자동차 시트, 가방, 목도리까지 손으로 다 만들어 내셨다. 양말은 구멍 나면 꿰매어 신기고, 옷은 해진 곳을 기워 다시 입으셨다. 이런 손재주에 매우 놀란 사건이 있었다.


“엄마, 내 바지 꿰맸어요?”

“어~ 구멍이 나고 해졌길래 단단히 박아 놨어.”

“아니, 이건 원래 찢어진 청바지란 말이에요.”

“세상에 일부러 청바지를 찢어 입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그지 새끼도 아니고”


1990년대 힙합 패션이 전국을 휩쓸 때, 찢어진 청바지와 긴바지로 길거리를 쓸고 다니는 그지들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해서 찢어진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을 사셨던 엄마에게는 내 자식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는 사실이 마음이 찢어져서 꿰맸을 것이다. 기장은 줄여서 예쁘게 단을 만들어 놓으셨다. ‘아~ 엄마의 손재주 신이시어, 정령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주부는 단순히 집안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는 가정의 경영자였다. 정해진 수입으로 다섯 식구가 살아야 했기에, 더 벌 수 없다면 아껴야 했다. 당시 프로 주부의 실력은 ‘얼마나 알뜰한가’로 판가름 났다. 우리 집 주부 역시 허투루 쓰는 법이 없으셨다. 쓰레기봉투 20리터는 엄마 손에 들어가면 30리터로 변신했다. 물론 가끔 옆구리가 터져 내용물이 쏟아졌지만, 박스테이프로 붙이면 1리터는 더 담을 수 있었다.


“엄마, 그만 담으세요. 터지겠어요.”

“꾹꾹 누르면 더 들어갑니다요~ 으쌰!”

“펑!”

“거 봐요, 터졌잖아요.”

“...잔소리 말고 테이프나 가져와.”


나는 웃기면서도 슬펐다. 왜 그렇게까지 아껴야 했는지 그 당시에는 몰랐다.


명절이 되면 엄마는 진짜 마법사가 되었다. 서울에 사는 아빠 쪽 친척들이 모두 모여 20명 넘는 식구가 한꺼번에 식사해야 했는데, 그 모든 음식을 엄마 혼자 준비하셨다. 장보기는 일주일 전부터 시작됐다. 미리 다듬어 둘 재료와 전날 사야 하는 신선 재료를 나누고, 전날 볶아둘 것과 당일 끓여야 할 것을 구분했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이미 거대한 타임테이블이 완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명절날 우리 집 식탁은 늘 풍성했다. 친척들은 매번 엄마의 솜씨에 감탄하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주부는 그 칭찬 한마디에 버틸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갈비찜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이 날을 기다렸지만, 명절이 끝나면 엄마는 늘 앓아누우셨다. “내가 좀 고생하면 많은 식구가 화목해지잖아. 난 그게 좋아.” 하지만 나는 화목한 것보다 엄마가 안 아픈 게 좋았다. 방에 누워 계시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알았다. 가족의 화목은 누군가의 몸과 시간을 다 바치는 헌신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그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는 친척들이 야속했고, 그때부터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우울해졌다. 명절 증후군은 어린 내게도 있었다.


누군가의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 뒤에는 반드시 주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내가 누린 따뜻한 밥 한 그릇, 말끔한 교복, 즐거웠던 명절의 추억. 그 모든 것은 엄마의 손끝에서 비롯되었다.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엄마의 존재가 사실은 가장 귀한 기적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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