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주부아빠가 되었습니다

by 솔솔솔파파

벤처기업에서 시작해 대기업 자회사까지 다니면서, 저는 바쁘고 경쟁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수출 상담차 해외를 오가고, 때로는 야근과 출장으로 일상이 채워졌습니다. 연봉도 제법 높았고, 커리어도 안정적이었기에 제 삶은 겉보기엔 꽤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전업주부로, 그것도 ‘주부아빠’로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종종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냥 잠깐 쉬는 거 아니에요?”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아내가 몸도 마음도 지쳐 회사를 다시 다니기로 결심했고, 자연스럽게 제가 육아휴직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시간이 지금은 명백한 ‘전업주부’의 삶이 되었습니다. 왜 좋은 커리어를 내려놓고 주부가 되었느냐고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첫 아이가 태어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그 순간, 제가 품에 안은 그 조그마한 존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감사, 경이로움, 벅참, 그리고 한없이 무거운 책임감.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나 가슴 벅찬 일이구나, 처음으로 실감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문득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너 앞으로 어떻게 살래?’


하늘은 맑고 기온은 따뜻했던 어느 날,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하던 중 이 질문이 제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스스로에게 제대로 대답해 본 적 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실 그즈음 제게는 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첫 아이가 생겼을 무렵, 회사 건강검진에서 암 진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치료를 받고 3개월간 휴직한 뒤 다행히 회복되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했습니다. 아내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는데, 나는 이 아이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 제 품에 안겼을 때,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아빠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질문.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예측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 질문은 제 안에서 계속 자라났고, 결국 저는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죠.

처음 선택한 길은 제주에서의 ‘한 달 살기’였습니다. 새로운 환경이 삶을 바꿔줄 거라 기대했지만, 결국 1년 반 만에 다시 육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장소가 바뀐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었습니다.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환경이 달라져도 본질은 같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삶의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직접 농사를 배우고, 씨를 뿌리고, 땅을 일구며 생명과 돌봄을 배웠습니다. 그 경험은 단지 농작물을 얻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시간과 호흡을 맞추며 사는 법,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인연은 지역의 대안학교로 이어졌고, 저는 그곳에서 교사로도 일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 심리학, 철학, 예술치료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과 삶을 조금씩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돌아보니, 주부라는 역할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나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차곡차곡 다져진 삶의 일부였습니다.


한때는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주부’라는 이름. 이제는 제 인생의 중심에 있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9년 가까이 출산과 육아휴직을 반복하며 삼 남매를 낳고 기르고 키워 온 아내에게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삼 남매와 함께하는 것은 물론 큰 축복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내는 집과 아이들과 잠시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고, 다시 직장에 복직하기로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육아휴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주부아빠’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자신이 있었습니다. 직장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혼자 살던 시절에는 내가 조절만 잘하면 되었기에 살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섯 식구의 살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시간이 많을 거라는 환상은 일주일 만에 산산이 깨졌습니다. 옆에 있어도 몰랐던 가사일과 감정 노동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감정노동’이었습니다. 가사일은 눈에 보이니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지만, 감정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속에서 맴도는 감정을 혼자 삭여야 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묵혀 놓은 감정이 어느 날 터져버리면 아이들에게 미안해지고,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루를 우울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하루하루를 아내는 혼자 묵묵히 9년을 보내 왔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해졌습니다. 아내가 복직 후 첫 출근 할 때 설레고, 긴장하면서도 웃음을 보였던 이유는 내가 겪을 앞날을 알았기때문일 것이라는 강력한 의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육아는 하루하루가 감정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기분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렸습니다. 기쁘다가 슬펐다가, 행복하다가 우울해지는 감정이 실시간으로 휘몰아쳤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동네 아주머니를 붙잡고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역시 깊은 이야기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주부는 월급은 없지만, 엄청난 노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그것도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고강도의 노동자였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 있으면 편하잖아.”


하지만 이 안에 직접 들어와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소파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어느 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살림이나 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1년간 살림만 해야 하는 감옥에 가둬 놓는 형벌을 준다면 어떨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런 상상을 하면서 피식 웃는 시간은 작은 위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주부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이름조차 낯선 ‘주부아빠’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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