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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쏠이 Dec 14. 2023

일-고민 2

이 글은 23년 10월 7일 개인 인스타그램에 발행 한 글을 업로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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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마운트 플러스 콘텐츠를 서비스 해주는 갓 티빙 덕에 내 어릴 적 최애 드라마 CSI 시리즈를 다시 보고 있다. 다시 봐도 재미있는 건 똑같은데,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장면은 달라졌다. 어릴 때는 해부 장면이나 CSI 요원들의 추리, 귀여운 그렉 샌더스 모습에 더 눈길이 갔다면, 요즘은 등장인물이 일하는 모습에 더 주목하게 된다. 타르(Tar) 속에 묻혀 있는 시신이 발견됐단 소식을 듣고 업무 시간이 아닌 데도 신나서 달려 나와 동료 캐서린을 돕는 그리섬 반장이나 피살자 근처에서 발견된 곰 해부를 하면서 학술지에 이 내용으로 논문을 쓰면 “다들 좋아할 거”라고 말하는 로빈스 박사 모습을 보면 ‘저들에게 일이란 그냥 돈 벌려고 하는 건 절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위 두 인물 말고도 CSI 요원에게 일은 곧 그들의 삶이나 다름없다. 물론 일과 양육 사이에서 고통받는 워킹맘 캐서린을 보며 일과 삶의 균형 뭐 그런 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캐서린은 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CSI 라스베가스 시즌 5 에피소드 13화, 14화의 한 장면


나에게 ‘일’이란 그저 돈 버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기회 닿는 대로 일을 했다. 일단 생활비가 필요했고 듣고 싶은 사설 강의나 세미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20살부터 서빙, 행사장 인포 알바, 촬영장 스텝, 간단한 포스터, 웹자보 제작, 행사장 판매, 녹취 풀기, 설문조사 하기 등등 이것저것 돈 벌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했다. 생활만 유지할 수 있다면 돈이야 뭐 어떻게 벌든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알바만 했다. 이렇게 살았는데 정말 너무 운 좋게 알바 생활 약 6년 만에 어쩌다 보니 직장인이 되었다. 시급제가 아닌 월급제, 연봉 인상의 기회도 있고, 휴가도 있고, 연말정산도 해주고, 4대 보험도 들어주는 직장이라니! 꿈만 같았다. 알바하며 살 때는 느껴본 적 없는 안정감도 갖게 되고 좋았다. 그냥 이렇게 일이나 하고 돈이나 벌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 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지만.


‘직장인’이 되어 보니 액수가 정해져 있는 월급을 다달이 받는 건 참 좋은 것 이란 걸 깨달았다. 다만 월-금 오전 9시부터 6시, 점심시간까지 9시간은 내 인생에서는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임에도 넘치는 회사 일을 해내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 있으면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공부해야 하고, 잘 안 풀리는 일을 만났을 땐 집에 와서도 편히 쉴 수가 없다. 퇴근하고 일 생각 안 하는 사람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정말 딱 ‘9 to 6’ 일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있기나 할까? 일과 삶은 무 자르듯 툭 잘리는 게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속으로 “맑스 형 아무리 생각해도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은 좀 낡은 구호 같아.”* 라고, 되뇌었다. 그렇다고 다시 전업 파트타이머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럼, 뭐 “충분히 일할 수 있게 노동시간을 늘리자”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일하고 살 거면 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주말에도 시체농장 에 가서 시신의 부패 정도에 관해 공부하는 그리섬 반장처럼, 일에 관한 공부를 자발적으로 할 수 있으면서도 만족감이 들고, 쉬는 날에 일 생각 나도 열 받기 보단 즐거울 수 있는 그런 일.


『퇴사는 여행』 저자도 그렇게 즐겁게 잘만 사는 것 같던데,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 몇 없다 해도 나도 그런 “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슨 일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한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아서 이것저것 뒤적여 보다 ⌈일놀놀일⌋이라는 책도 읽어 봤다. 하지만 당연히 이게 무슨 신탁((神託)의 서(書)도 아니고 “이 일을 해야 돈도 벌고 재미도 있음”이라고 정해주진 않더라. 다만, 좀 다른 해답을 얻었다. 그냥 꾸준히 재미있는 일을 할 것.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 그게 오히려 답이라면 답이었다. 당장 “재미있는 일 나와라!” 한다고 나올 건 아니니까, 지금처럼 계속 꾸준히 고민하고 내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는 걸 찾아 떠돌아다닌다면 언젠가 일과도 마주할 날이 오겠지.




*‘8시간 노동제’는 1817년에 로버트 오웬이란 사람이 만든 것인데,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한 ‘국제노동자협회’에서 1866년에 이를 정식으로 채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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