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도 햇볕도 아닌,
해가 기울기 직전의 들판에 서 있다.
풀들은 바람보다 먼저 스스로 눕고
쓰러진 방향을 오래 보다 보면
몸이 먼저 배우는 쪽이 생긴다.
경험이 없다는 것은
돌이 많은 길을 맨발로 걷는 일이라서
아픔은 남지만 이유는 따라오지 않는다.
멀리에는 낡은 깃발이 홀로 서 있다.
가까이 갈수록 그림자만 길어진다.
손은 흔들리지만 쫓기는 것은 없다.
들판의 끝을 본다.
울타리 너머,
해가 내려앉는 쪽을 바라본다.
그곳에서는 풀의 키가 다르고
바람도 다른 길로 들어올 것 같다
태양 너머로 가면
살갗이 타들어 가도
다시 자라는 풀처럼 버틸 수 있을 거라
믿던 때가 있었다.
몇 번의 저녁을 넘겼다.
습관은 뿌리처럼 깊어서
겉은 말라 보여도
아래에서는 계속 물을 붙잡고 있다.
발목에 묻은 흙은 사슬이 된다.
노를 젓듯 팔을 움직이지만
물이 아니라 들판이다.
앞으로 간다고 믿는 동안
걷는 흉내만 이어진다.
말은 줄어들고
몸은 흙 가까이 내려간다.
풀잎 하나가 흔들린다.
바람은 여전하다.